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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추리 Jun 14. 2020

정신대와 위안부..이용수 할머니는 왜 ‘다름’을 말할까

<<피해자가  '느끼는' 피해와 운동이 '파악하는' 피해>>

1. 뜻밖의 문제 제기


5월 25일, 이용수 할머니의 이른바 2차 기자회견이 대구 인터불고 호텔에서 열렸다. 윤미향 당선인과 정의연에 대한 추가 폭로와 비판이 나올 것이라고 모두가 집중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회견의 서두는 예상과는 조금 다른, 정확히는 전혀 예상 못한 내용으로 시작됐다. 할머니는 정신대와 위안부의 차이를 한동안 설명하며 울분을 토했는데, 당시 발언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정신대는 공장에 갔다 온 할머니들입니다. 공장에 갔다 온 할머니들 돕는 운동은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장에 갔다 온 할머니하고 위안부, 아주 더럽고 듣기 싫은 위안부 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정대협은 공장에 갔다 온 할머니들을 위하는 운동을 해야 하는데, 말하자면 공장에 갔다 온 할머니들로 반죽을 해서 빚어놓고 속은 위안부를 넣은 것입니다.


위안부를 정신대 할머니와 합해서 이용해왔습니다. 30년 동안 사죄하라 배상하라 하는데 일본 사람이 뭔지 알아야 사죄하고 배상하죠? 이렇게 섞어놓으면 사죄 안 해도 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신대와 위안부가 어떻게 같습니까?”


정신대와 위안부의 ‘혼용’은 단순한 착오가 아니라 근본적 오류라고 할머니는 주장하고 싶었던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자 정의연은 당일 매우 신속하게 개념을 정리한 설명 자료를 내며 할머니의 ‘오해’를 해명했다.


1) (근로)정신대와 위안부의 혼동은 운동 초기에 있었지만 노동 착취와 성노예의 차이를 이후 확실히 알고 있다는 것,

2) 두 개념의 섞임은 일제강점기부터 있었고 게다가 정신대로 징발됐다가 위안부로 끌려간 피해자도 있었기 때문에 아주 틀린 사용은 아니라는 것,

3) 지금은 단체명을 정의기억연대로 변경해 정신대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 등이다.

4) 결론적으로 과거 정대협이란 이름으로 활동했어도, 이름이야 어찌 됐든 시종일관 위안부 운동을 해왔다는 해명이다.


이런 설명을 듣다 보면, 이용수 할머니의 지적은 명칭 혼용에 대한 다소 과도한 분노 아닐까 하는 느낌이 없지 않다.


할머니의 집착인가? 세상 사람들의 눈과 귀가 집중된 기자회견장에서 굳이 정신대와 위안부의 차이를 거론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2. 위안부로 오해받은 정신대


7년 전인 2013년 11월 1일 상당히 의미 있는 판결이 있었다. 근로정신대 피해자 할머니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우리 법원에 제기한 손해 배상 소송에서 승소한 것이다.


비록 국내 법원이지만 어린 소녀들이 일본 공장으로 끌려가 강제적 노동에 내몰린 피해를 인정한 역사적 판결이었는데, 당시 법원은 판결의 배경 중 하나를 이렇게 설명했다.


“피해자들이 여성이어서 위안부로 오해받아 오랫동안 마음고생을 한 점이 고려됐습니다”


근로정신대로 끌려갔던 여성들이 위안부로 오해받아 주변에서 불편한 시선을 받고 급기야 가정이 깨지는 등의 파탄을 맞는 일들이 실제로 벌어졌던 게 한국사회의 엄연한 현실이었다.


정신대와 위안부는 같은 일제 피해자지만, 과거 우리 사회가 받아들이는 감도가 전혀 달랐다는 의미다.


이런 분위기에서 정대협의 등장, 즉 정신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위안부 운동 단체의 등장은 ‘위안부로 오해받는 정신대’라는 불편한 문제를 더욱 부각한 게 사실이다.


정신대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위안부로 오인되는 일이 더욱 많아졌고 따라서 위안부 운동은 정신대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내심 갖게 된 것이다.


다른 한편, 위안부 피해자들은 '왜 당신들이 정신대냐'는 굳이 듣지 않아도 됐을 수군거림을 들어야만 했고 더 나아가 일본 우익들은 정신대였으면서 위안부였다고 '거짓말'을 한다고 꼬투리 잡기에 나섰다. 정신대까지 다 섞어서 위안부 피해자 20만이라는 거짓을 만들었다고 공격한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이런 상황을 지켜보고 견뎌왔다.




3. 운동에서 중요한 문제, 피해자에게 중요한 문제


위안부와 정신대의 차이는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 보자면 작은 다름일 뿐 본질적으로는 똑같은 일제의 인권유린이라고 학문적으로 논증할 수는 있다.


그러나 위안부로 정신대로 고통받아온 피해 당사자들에게 용어의 혼동과 피해의 섞임은 그 자체 또 다른 피해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해봤을까?


앞서 정의연의 설명 자료에서는 이런 해명이 담겨있다.


“위안부와 정신대는 각기 다른 지원 단체가 있으며 활동가들은 이 둘을 혼동하지 않는다”


정신대와 위안부를 헷갈려하지 않은 활동가들의 교양 상태가 중요한 게 아니다. 문제는 정신대 피해자와 위안부 피해자의 섞임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면밀히 관찰해 왔는지이며 이용수 할머니의 지적은 바로 그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공개하고 운동의 최전선에 서온 이용수 할머니에게 지난 30년은 인권운동가로서 용기의 시간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상처가 세상과 거칠게 맞닿는 고통의 시간이기도 했다.


운동의 대의에서는 사소하고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고 굳이 논의할 필요조차 없어 보이는 어떤 사안들이 피해 당사자들에게는 꽉 막힌 체증처럼 몸과 마음을 짓누르는 그 무엇이었을지도 모른다.


위안부와 정신대는 다르고 내가 바로 위안부라고 다시 외치는 할머니를 지켜보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성찰일까 해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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