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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성 Oct 17. 2020

아버지의 체취가 느껴지는, 서울 낙원동 이발관 골목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 

아버지가 유산처럼 알려준 낙원동 이발관 / 이하 ⓒ 김종성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 아버지는 만날 일이 있을 때마다 서울 종로구 낙원동을 고집했다. 번듯한 인사동을 바로 옆에 두고 국밥집, 포장마차, 선술집, 낙원지하시장, 이발관까지 다양한 곳에서 아버지와 만났다. 후일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전해준 남다른 유산이 아니었나 싶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남겨줄 것이 없어서 미안해했다(고 어머니는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낙원동에 올 때면, 나란히 거리를 걸으며 왠지 뿌듯해하던 아버지 옆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지난 주말 아버지가 알려준 낙원동 소재 이발관에서 머리를 깎았다. 아버지가 오래 다녔던 이 단골 이발소에 가면 친숙한 냄새가 난다. 낙원동에 갈 때마다 아버지의 자취와 체취를 느끼게 된다.  

    

이발소 특유의 사인볼이 빙빙 돌아가는 가게 앞에는 하나같이 '이발 4000원, 염색 5000원'이라고 쓴 가격표가 나붙어 있다. 이 '착한 가격' 때문에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어르신들이 지하철을 갈아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멀리 천안이나 인천에서도 낙원동 이발관 골목을 찾아온다. 대한민국에 이런 가격이 가능할까 싶지만 이런 이발관이 즐비한 곳이 바로 이곳 낙원동이다. 1890년대 개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었다는 탑골공원 담장을 따라 골목으로 들어서면 주머니가 팍팍하고, 세상 빠르기가 버거운 어르신들의 낙원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낙원동은 일제가 동네 지명을 재편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1894년(조선 31) 갑오개혁 당시 낙원동 일대는 교동(校洞), 어의동(於義洞), 한동(漢洞), 원동(園洞), 탑동(塔洞), 주동(紬洞) 지역이었다. 1914년 4월 1일 교동, 탑동, 어의동 각 일부와 한동, 원동을 병합하면서 시내 중앙의 낙원지라 할 만한 탑골공원에서 '낙(樂)'자를 따고, 이곳에 있던 원동(園洞)이라는 동리의 '원(園)'자를 따서 합성해 낙원동이 탄생하게 된다. 

10여 개가 모여있는 낙원동 이발관 골목
특별한 서비스가 있는 낙원동 이발관                                

소읍이나 소도시에서 종종 만나는 재밌고 정다운 간판을 단 이발관. 머리 깎을 일이 없어도 괜스레 들어가 보고 싶게 하는 이발관이 다른 곳도 아닌 대도시 서울에 이렇게 모여 있다니 참 별일이다. 낙원 이발관, 뉴탑골 이발관, 장수 이용원 등 옹기종기 모여 있는 업소만 해도 열 개가 넘는다보니 낙원동 이발관 골목으로 불리기도 한다. 


주로 60대 이상의 노인들이 오다보니 이발관엔 ‘어르신 우선’ 화장실과 ‘생수 제공’ 팻말이 붙어 있다. 어르신 우선 화장실은 노인들이 실금·실변 등을 처리할 수 있도록 변기와 세면대가 하나로 된 변기일체형 세면대를 설치한 곳이다. 생수는 약 복용을 돕기 위해 제공한단다.      


20년에서 길게는 50년 경력의 이발사 아저씨들은 대부분 이발 기계를 안 쓰고 오로지 가위로만 머리를 깎는다. 귓가에서 들려오는 '사각사각'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와 나도 모르게 졸음에 빠지게 된다. 거울너머로 머리에 염색약을 바르고 일렬로 얌전히 앉아있는 할아버지들 모습이 말 잘 듣는 학생들 같아, 슬금슬금 웃음이 새어 나왔다. 머리를 다 깎은 후 뜨끈한 온수에 머리를 감고 나서 이발관 특유의 스킨 향을 맡으며 푹신한 소파에 앉아 믹스커피를 마시다보면, 어느 곳보다 아늑한 기분이 든다. 

수십년 경력의 가위손 이발사
이발사와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이발도구들

이발관엔 반은 이발 손님 반은 염색 손님이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흰머리를 한 노신사가 들어와 염색약을 바르고 내 옆에 앉았다. 멋스러움이 느껴지는 흰머리가 떠올라 넌지시 “염색하시는 것보다 흰머리가 더 멋지세요.” 하고 말을 건넸다. 아파트 경비 면접 보러 오라고 해서 한살이라도 더 젊어 보이려고 염색하셨단다. 그러고 보니 이 도시에선 나이 듦 혹은 원숙함의 상징인 흰머리를 한 노인을 보기 힘들다. 어쩌다 늙음이 추하고 숨겨야 할 것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내 아버지의 단골이었던 이발관 사장님은 무려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손님들 머리를 깎아왔다. 젊은 시절 뭐해서 먹고 살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이발사가 말끔하고 뽀얀 가운을 입는데다 무엇보다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뜨뜻한 직업이라 선택했단다. 당시엔 이발사, 운전사가 인기직종이었다고 한다. 이발 기술은 정년퇴직 없이 자기 건강만 허락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 좋다고. 참고로 우리나라 이발의 역사는 1895년(고종 32년) 김홍집 내각에 의해 단발령이 시행된 뒤, 왕실 최초의 이발사 안종호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이발가격이 싸다보니 5천원을 내고 거스름돈은 수고비라며 주고 가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이발을 끝낸 어느 손님은 음료수 한 병을 이발사에게 건넸다. 이발사 아저씨는 이곳은 단순히 머리를 자르는 곳이 아니라 정을 나누는 곳이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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