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마지막화
사실 차무식(최민식)이 라울을 불태웠던 순간 이미 사망 플래그가 뜬 것이다. 절대적 권력자인 다니엘의 명령, ‘가족을 해쳐선 안된다’는 불문율을 어겼기 때문이다.
냉정한 차무식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 그때부터 차무식의 왕국은 무너진다. 감정적이고, 충동적이며, 생전 처음 눈물까지 보인다. 깡패들이 총칼로 위협해도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았던, 특수부대출신, 필리핀의 왕이었던 그가 나약한 노인으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비록 악인이었지만, 인생의 밑바닥부터 평생을 필사적으로 적응해가며, 불꽃처럼 최선을 다해 살았던 그가 영락해가는 모습은 먹먹하고 씁쓸하다.
다니엘을 피해서 한국으로 도망친 그는 아내에게 묻는다.
“호주에서 목장이나 하면서 살까”
아내 : 당신은 지루해서 하루도 그렇게 못 살아.
위험한 욕망과 도파민이 넘치는 필리핀이야말로, 차무식 다울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한국이나 호주에서 평생을 도망자로 연명한들, 그것이 인간 차무식에게는 껍데기뿐인, 죽음과 다름없는 삶인 것이다. 필리핀으로 돌아가면 죽을수도 있다는 걸 예감하면서도, 카지노, 돈, 사업, 모든것을 버리고 떠날수 없음을 그는 필연적으로 깨닫는다.
지하금고가 비어있음을 확인한 순간, 원래의 차무식이라면 당연히 정팔이를 가장 먼저 의심했어야 한다. 몇번이나 목숨을 구해주고, 가족같이 한솥밥을 먹었지만, 정팔이같은 인간은 그 어떤 도리나 인간성보다, 자신의 욕망을 우선시한다는 것을 그가 인지하지 못했을리 없다.
하지만 평생을 타지에서, 누군가의 위협속에서 칼날 위를 걷는 심정으로 살아왔던 피로감, 불안의 번아웃. 결정적으로 아버지라 불렀던, 그의 든든한 뒷배경인 다니엘로부터 쫓긴다는 두려움과 당혹감은 그를 평범하고 나약한, 감정적인 인간으로 격하시킨다.
드라마 후반부터 상구에게는 시종일관 의심과 배신의 가능성을 거두지 않으면서도, 끝내 정팔이에게만은 마지막까지 믿어보려는 집착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너무나 지쳤고, 외로웠기 때문이다. 다니엘과의 절연, 형제 같았던 존의 배신과 죽음. 무일푼으로 쫓기는 삶. 이제 정팔이라는 가족까지 잘라낸다면, 필리핀에서의 그의 삶은 어떤 의미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화무십일홍이라는 대화로 드라마는 1화부터 정팔의 배신을 암시하지만, 그래도 차무식은 끝까지 정팔이와의 의리를 믿었다. 비정한 악인이지만 끝내 외로움을 모두 떨쳐내진 못하였다. 차무식에게 정팔이는 ‘마지막 인간애’ 였던 것이다.
악인조차 되지 못한 비겁한 양아치 정팔이가 마지막에 성공하는 최종장면은 심한 허탈감과 감독에 대한 배신감을 주었으나, 그 역시 화무십일홍의 운명에서 자유로울수 없으리라.
차무식, 그는 진정 멋진 악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