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구팔구 팔레트 Sep 29. 2023

보름달이 뜨는 날, 편지할게요.

보름달을 향해 달려본 적이 있습니다. 때는 몇 해 전 가을, 지중해의 작은 섬 몰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라임스톤으로 지어진 오래된 건물이 자리 잡은 슬리에마의 좁은 골목을 걷고 있었어요. 노르스름한 가로등 빛에 테라스의 그림자가 고르게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화려하게 건물을 뒤덮은 부겐빌레아와 능소화마저 밤이 되면 그 일부가 되곤 했죠. 그렇다 보니, 방금 걸어온 골목이나 지금 걷는 골목 그리고 다음에 걷게 될 골목이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하지만, 보름달이 뜨는 날은 달랐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느 한 골목을 꺾어 들어서자마자 저는 걸음을 멈춰야 했습니다. 보름달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에요. 그 골목은 이제껏 보던 것과 다른 인상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집으로 가던 일은 새까맣게 잊은 채 보름달만 보며 걸었습니다. 조금만 더 걸으면, 닿을 것만 같은 기분에 점점 안달이 났어요. 보폭을 넓히며 속도를 냈죠. 그러나, 결코 닿을 수 없었습니다. 보름달은 골목의 지평선에서 조금씩 멀어졌거든요. 저는 마냥 우러러보아야 했습니다.


몰타의 보름달

 

어째서 일까요. 보름달을 볼 때마다 처음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처음 보는 것처럼 반하고, 처음 보는 것처럼 알고 싶고, 처음 보는 것처럼 감탄합니다. 그저, 달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다가 태양 빛을 온전히 받아 빛나는 것일 뿐인데, 그러니까 스스로 빛을 내지도 않는 것에 아득한 감정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매번 깜짝 놀라고 마는 것이지요. 네, 맞아요. 저는 보름달을 늘 처음 보는 것처럼 사랑합니다.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평소와 다르게 어둠이 포근하게 느껴집니다. 꼭 보이지 않는 솜이불로 둘러싸여 있는 것만 같아요. 공기를 이루고 있는 입자마다 보름달의 빛이 서려있는 듯해요. 그날만큼은 잠을 이루지 못해도 괜찮을 것만 같고요. 지구 위의 모든 존재를 다독여주는 그 마음이 고맙기만 합니다.

 

제가 보름달의 다정함을 닮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는 보름달처럼 둥근 사람이 아니거든요. 하루종일 삐쭉거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느라 밤이 되면 지쳐서 집에 돌아옵니다. 제 살을 파고드는 날 선 마음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땅바닥으로 쓰러집니다. 그런 날이면 보름달의 존재가 그리워집니다. 저를 지구 밖으로 당겨주는 그 힘이 말이에요. 보름달은 그렇게 저를 일으켜 세우고 맙니다. 그렇죠. 두 발로 다시 설 수 있게 해주는 거예요. 균형을 잡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보름달은 주기적으로 저를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을 찾아옵니다.

 

보름달이 뜨는 날마다 편지를 부칠까 합니다. 보름달에게 배운 언어로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나와 당신을 지탱해 주는 그런 편지를요. 어쩌면 흉내내기에 그칠지도 몰라요. 저는 달이 지구를 바라보며 회전해 온 그 아득한 시간을 감히 헤아릴 수 없으니까요. 그래도 써보고 싶어요. 보름달을 동경하고, 아끼고, 그리워하고, 보살피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꿈꾸는 마음으로 혹은 보름달을 시기하고, 탐내고, 넘보는 마음으로요.

 

오늘도 꼬박 밤을 새우고 있습니다. 밤이란 시간은 혼자를 더욱 혼자로 만들어주지만, 지금은 보름달이 있어서 괜찮아요. 게다가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잖아요? 나름 근사한 것 같기도 해요.(웃음)

 

문장 사이마다 촘촘히 달빛을 수놓아서 편지를 띄웁니다. 당신이 아침에 눈을 떠 이 편지를 읽을 때, 보름달이 지나간 자리도 함께 살펴주길 바랄게요. 이 편지는 보름달을 좇으며 쓴 글이니까요.

 

 


이천이십삼 년 열 번째 보름달 아래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