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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구팔구 팔레트 Feb 04. 2024

살짝 설레고 말았어요.

오늘 밤만큼은 좋아하는 편지 쓰기를 합니다.

은애 님에게


저는 밤이 되면 반드시 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일이 있답니다. 그것이 바로 읽기와 쓰기예요. 지독한 불면증을 앓는 저는 저녁 식사 후엔 머리가 돌아가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읽기와 쓰기처럼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말이죠. 밤마다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멀리해야 한다니, 편지를 쓰면서 조금 속상한 기분도 듭니다. 그럼에도 이 시간에 은애 님에게 편지를 쓰는 이유는 야심한 밤에 날아든 편지 때문이에요. 다름 아닌 은애 님께 받은 편지에 살짝 설레고 말았거든요.


편지의 제목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습니다. 더 알고 싶은, 궁금한 사람이었어요라니요. 게다가 첨부한 손글씨가 빼곡히 담긴 편지를 담은 사진에 저도 모르는 사이 입 밖으로 감탄사가 흘러나오며 눈도 커다래졌어요. 그리고 생각했죠. 지금 이 마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말이에요. 그래서 잠이 찾아오지 않을 것을 염려하기보다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가슴 뛰는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저는 종종 심장 박동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합니다. 그날도 심장이 몹시 뛰었던 걸로 기억해요. 누군가 나와 친해지고 싶다는 이야기만큼 설레는 일이 또 있을까요? 긴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사무실에서 만난 동료가 전해준 말이었습니다. 


"은애 님이 은영 님이랑 친해지고 싶대요." 


사실, 저도 그런 마음이 들었던 적이 있었거든요. 부서에서 자기 계발 명목으로 취합한 구매 희망 도서 목록에서 호프 자런의 랩 걸을 보고 그 책을 신청한 사람이 궁금했거든요. '조은애'라고 쓰인 석 자에 어쩌면 나와 주파수가 맞는 사람일 수 있겠다는 촉이 발동했어요. 괜히 쭈뼛거리며 제가 은애 님 자리로 가서 말을 걸었던 것 기억하나요? 랩 걸』 신청하셨죠? 반가워요, 하고 건넨 말이요. 그 말이 힌트가 되진 못 했는지 그 후로 관계를 더 이어갈 만한 기회가 생기진 않았어요. 나중에 은애 님과 가까워지며 진작 대화를 나눴다면 좋았을 텐데 아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저는 그래도 괜찮아요. 그로부터 수개월이 흘렀지만 어찌 되었든 우리가 연결이 되었고 지금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쌀쌀한 요즘, 생강차를 즐겨 마시곤 해요.

회사에서 잠시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옆 자리 동료에게 커피 한 잔 하자고 넌지시 건네던 때를 생각해 봅니다. 저는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탓에 늘 차 마시러 가자고 목적어를 바꿔보려 애를 썼지만, 관용적 표현으로 굳혀진 커피 한 잔이라는 용어 앞에서 늘 주춤거리기 일쑤였어요. 그것이 뭐 대수냐 싶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소수의 입장에서 자신의 언어를 대신해 다수가 지배하는 언어를 받아들이는 순간 나를 잃기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다수의 문법에 익숙해져 나도 모르게 커피 한 잔 하러 가자고 말하게 되면 상대방이 내게 건네준 잔엔 아메리카노가 채워질 가능성이 높아지는 법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은애 님에게는 커피 한 잔 대신 차 한 잔 하러 가자고 말하기가 쉬웠습니다. 은애 님은 저를 알아봐 준 사람이었으니까요. 표정 없이 지내야 하는 사무실에서 자신이 지닌 다름을 지키려고 애쓰는 저를 말이죠. 은애 님 역시 그런 사람이었어요. 자신의 다름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 타인에게도 다름이 있음을 아는 사람. 모든 존재마다 지니고 있는 고유의 다름을 지켜주고 그 힘을 믿어주는 사람이죠. 저에겐 은애 님이 바로 그런 사람이에요.


커피 한 잔 대신 차가 아니라 편지를 쓰자고 한 이유는 아무래도 제가 퇴직을 하고 은애 님을 가까이에서 만나지 못하는 탓이 가장 큽니다. 예전 같았으면 하루에도 수없이 마주치는 은애 님에게 가볍게 제안해서 은애 님은 커피를 저는 차를 앞에 두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니까요. 


그럼에도 문자나 전화도 있는데 왜 하필 편지냐고 묻는다면, 아무래도 제 감정에 솔직해져야 할 것 같아요. 은애 님과 나누는 대화가 즐겁고 소중하기 때문이에요. 저에게 편지란 애정 없이 결코 쓸 수 없는 글입니다. 그렇기에 대상이 가장 중요하죠. 음, 더 솔직히 말할게요. 그러니까, 은애 님이기 때문에 편지를 쓰자고 한 거예요.


지금으로부터 약 반년 전(아니! 벌써 반년이나 되었네요.), SNS에 제가 쓴 퇴직 인사글에 은애 님이 남긴 댓글을 다시 찾아봤어요. 


- 은영 님을 알게 되어 감사한 시간이었어요. 앞으로의 날들도 응원할게요. 이제 친구로 만나 놀아요!!


저 역시 약 십 년 간 보낸 회사 생활의 마지막에 은애 님이 있어 감사하고 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때나 지금이나 온전한 서로를 바라봐주는 존재라는 점에서 은애 님은 제게 좋은 동료이자 친구임이 틀림없거든요. 나 자신만으로 충분히 이해받지 못하는 순간에 드는 외로움을 달래줘서 고마워요.


 잠이 잘 오도록 저는 밤엔 무드등만 켜 놓고 지낸답니다.

그만 편지를 줄일까 합니다. 자정이 넘도록 쓰게 되면, 정말 잠을 드는데 곤란할 것 같아서요. 그래도 설렘이란 감정에 충실해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하는 편지 쓰는 일로 보낸 밤이라 무척 즐거웠어요. 


그러고 보니 은애 님의 밤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최근 몇 해 동안, 밤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밤, 잠, 꿈 이 세 박자 안에서 생각이 돌고 도는 데요, 막상 타인의 밤을 생각해 본 지 꽤 오래된 것 같아요. 은애 님의 밤은 어떤가요? 혹, 밤이 아닌 다른 시간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면 그 이야기도 좋아요. 하루 중 은애 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순간 같은 것 말이에요. 은애 님을 가까이에서 자주 볼 수 없으니 이런 소소한 일상이 알고 싶어요.


이제 정말 편지를 줄이도록 할게요. 이야기 화수분인 저는 편지에서도 무척 수다스럽죠?(하하) 그럼, 좋은 밤 되길 바라요.



2024. 01. 28.

자정이 되기 전,

은영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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