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경험한 모든 죽음들
할머니가 죽었을 때 나는 외근 중이었다. 모 병원의 병원장을 인터뷰하고 회사에 복귀하려고 지하철을 타러 가고 있었다. 나에게 할머니가 죽었다고 연락을 한 사람은 엄마였다. 메시지를 받고 나는 용인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을 네이버 지도로 검색하고,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며 카톡으로 회사에 비보를 전했다.
장례식장은 외근지에서 두 시간 반 거리에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내려서 버스로 갈아타고 총 세 시간을 가야 했다. 장례식장에서의 시간은 산 사람들이 앞으로도 살기 위해 다 같이 평생 죽은 사람을 생각하며 쓸 슬픔의 총량을 절반가량 쏟아붓기로 합의한 3일이었다. 그러니 나 또한 이제 온 마음을 다해 슬퍼하러 세 시간을 가야 했다. 사실 나는 할머니가 살아있을 때 명절이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가 아니고는 먼저 찾아간 적이 없고, 전화도 거의 안 했으며 딱히 그리워하거나 보고 싶어 한 적도 없었다. 그랬던 내가 할머니가 고인이 되자마자 온 마음을 다해 슬퍼하러 세 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최대한 빨리 가려고 한다는 게 뭔가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버스를 탔다. 장례식장에 가는 버스 안에서는 뭘 하는 게 좋을까. 할머니가 좀 전에 돌아가셨는데 태연하게 책이나 읽고 음악이나 들어서는 안될 것 같았다. 아무튼 평소에 하던 걸 할 수는 없으니 대신 조용히 할머니를 애도하기로 했다. 그러나 막상 하려니 그것도 잘 안돼서, 그냥 다 때려치우고 멍하니 창밖을 봤다. 노랑 주홍 물이 든 단풍들이 바람에 스산하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단풍이 흩어지는 방향을 눈으로 좇다가 지루해지면 졸았다. 졸다가 깨면 다시 창밖을 봤다.
할머니가 죽기 20년 전에 아버지가 죽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명절에 친척들을 만날 때, 아버지를 꼭 닮은 삼촌들 더러 삼촌의 자식들이 아빠, 아빠, 할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크게 느꼈다. 명절에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할머니는 밥상 앞에 앉아 네가 아빠가 없으니 공부 더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으레 했다. 그 말을 들은 친척들은 얘가 머리도 좋고 공부도 잘하니까 잘 되겠지. 등의 형식적인 말로 되받았다. 엄마는 명절에 한 번씩 만나는 친척들에게 아빠의 부재로 인한 본인의 자격지심을 드러냈다. 나와 동생에 대해 과장해서 칭찬을 하거나 때로 흉을 보거나 다른 친척들의 자식을 맥락없이 칭찬하는 식이었다. 그런 말을 하면 할머니는 니들 엄마 말 잘 들어. 특히 너. 라며 나를 지긋이 쳐다봤고 나는 그 상황이 싫어 자리를 얼른 피해버리곤 했다. 유령처럼 앉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폰만 보다가 밥만 먹고, 철이 없고 냉정하다는 둥 온갖 불편한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명절이면 꼬박꼬박 엄마를 따라 친가에 갔다. 할머니를 뵈러 가는 건 내가 할머니와 친척들에게 차릴 수 있는 최소한이자 최대한의 예의인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친척들을 의무적으로 보러 가지 않아도 될 날이 오기를 기다리곤 했다.
할머니는 늘 나를 불쌍하게 생각했고 나를 불쌍하게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내게도 강요했다. 네 아빠 어떤 사람이었는 줄 아니. 참말로 좋은 사람이었다. 인물도 훤했고 공부도 참 잘했지. 너는 네 동생이랑 엄마랑 잘 챙겨라. 네 엄마 짝 잃은 불쌍한 사람이다. 네가 잘해야 한다. 할머니는 내가 집에 갈 때까지 피해다니는 나를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저런 말을 했다. 할머니는 나와 동생과 엄마가 아빠가 없어서 얼마나 불행하고 비참한지 확인하고 싶어 했고, 그럼에도 내가 그 불행함으로부터 벗어나 잘 살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먹고 노력해 빛나는 무언가가 되기를 바랐다. 나는 할머니에게 별다른 대꾸를 안 했는데, 할머니는 그런 내게 무척이나 서운함을 느끼고는 했다. 죽기 3일 전에 내게 전화가 왔었다. 너는 이 할미 보러 안 오니. 할미 보고 싶지도 않니. 그래, 잘 지내고.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지만, 알았다고 한들 내가 뭘 할 수 있었을까. 마지막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할머니가 원하는 손녀의 모습이 돼준 적은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할머니가 원하는 손녀의 모습은 내가 원하는 손녀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니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뭔가 달라질 리 없었다.
별안간 눈물이 쏟아졌다. 내 의지가 아닌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 속에 있던 뭔가를 꺽꺽 토해내듯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버스에 탄 사람들의 시선은 개의치 않고 그냥 마음껏 울었다. 엄마나 친척들 앞에서 우는 것보다는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우는 게 차라리 나았다. 가방에 휴지가 없어 옷소매로 눈물 콧물을 다 닦았다. 그렇게 한 시간쯤 울고 나니 내려야 할 정류장에 가까워졌다. 창밖에는 이제 낙엽은 안 보이고 온통 까만 밤이었다. 내려서 장례식장으로 올라가는 길은 긴 언덕이어서 10분쯤 또 걸어야 했다. 언덕을 오르는데 또 눈물이 쏟아졌다. 엉엉 울고 아픈 가슴을 두드리며 느릿느릿 걸어가는데 옛날 생각이 났다. 1997년도에 IMF로 아버지가 하던 사업이 부도가 났다. 빨간딱지가 잔뜩 붙은 가전기구들이 남은 아파트에서 쫓겨 나와 할머니 댁으로 들어가서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나 이렇게 다섯이서 같이 살았다. 나는 할머니 손에 컸다. 할머니가 옷도 사주고, 머리도 땋아주고, 맛있는 것도 많이 해줬다. 머릿속에서 할머니와의 추억들이 휙휙 스치고 지나갔다.
엄마는 나보다 삼십 분 늦게 도착했다. 오자마자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보고 눈물을 똑똑 흘리며 울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이 따라 울었다. 나는 울지 않았다. 삼일 동안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오고 갔다. 어릴 때 잠깐 봤던 먼 친척들, 친척이 낳은 자식들, 그 자식의 자식들도 왔다. 엄마 친구들도 몇 명 왔다. 내 지인은 내가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오지 않았다. 다음날 만나기로 했던 친구들에게 이런 사정이 생겨 내일 못 만날 것 같다고 연락했고, 그러자 그 친구들이 오만 원씩 부의금을 보내줬다. 상사로부터 소식을 들은 직장 동료들 몇몇도 부의금을 보냈다. 그 돈을 어디다 써야 할지 고민하다가 입관식에 따라나섰다. 영혼이 빠져나간 자리에 남아있는 할머니의 빈 껍데기는 초라하고 불쌍했다.
할머니의 인생을 생각해본다. 10대 때 한국전쟁을 겪었고 친구들이 위안부로 끌려가는 걸 목격해야 했던 끔찍한 시대에 태어났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집에서 강제로 할아버지와 결혼시켜, 그것이 평생의 한으로 남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할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어서 돈을 잘 벌어다 줬고 가정적이었으며, 다른 여자에게 한눈팔지 않고 할머니만을 돌보며 평생 둘이 동고동락하며 서울에 집도 하나 마련했다. 그들이 낳은 자식들이 장성하여 자식을 낳고, 낳은 자식들이 성인이 되어 대학에 들어가고, 취직을 하여 무사히 사회가 합의한 울타리에 들어가는 걸 보고 난 후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는 10년쯤 더 사셨는데, 할아버지가 없는 10년은 할아버지가 있을 때보다는 쓸쓸하기야 했겠지만 그래도 할머니는 죽는 날까지 아들과 아들 며느리의 보살핌을 받으며 큰 불편함 없이 살았다. 죽기 전에는 갖고 있던 연립주택을 팔아 만든 자금을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눠줬다. 그만하면 성공한 인생이 아니었을까 하면서도 나는 할머니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자식들과 자식의 자식들만 바라보며 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
난 장례식장에서 기인한 그 모든 비릿하고 비참하고 시큼한 삶의 얼룩과 얼룩으로 인해 파생된 잡다한 생각들을 얼른 벗어던지고 싶었다. 샤워를 하고 넷플릭스를 보며 평소처럼 하릴없이 나뒹굴고 싶었다. 집에 가고 싶었다. 아버지가 죽었고 할아버지가 죽었으며 할머니가 죽었고 나도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그저 담백하게 받아들이고 싶었다. 3일이 지나 할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후 상복을 수거함에 벗어던지고 얼른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자리에 누운 나는 계획대로 넷플릭스를 켰다. 하지만 평소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마음이 시큰시큰 아팠다. 마음이 아플 때면 타이레놀을 먹는다. 그래서 타이레놀을 먹었는데도 계속 마음이 아팠다. 잠도 오지 않았다. 불쌍해서 어쩌냐며 나를 바라보던 불거지고 축 쳐진 눈시울의 할머니. 그런 할머니가 이제 그저 편안히 쉬기를, 편안하기를 바라며 그렇게 며칠을 애도하며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
할머니가 가을에 죽은 것처럼 아버지도 오래전 가을에 죽었다. 그래서 누가 좋아하는 계절을 물을 때 나는 가을을 좋아하는데도 선뜻 가을이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는 인간도,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인간도 언젠가 모두 죽는다. 어쩌면 나도 가을에 죽게 될까. 최근 몇 년 동안 할머니가 죽는 건 언젠가 일어날 일이라며 나름 각오를 해왔는데, 내가 죽을 때도 나는 언젠가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며 받아들이게 될까. 고독감이 허파를 쑤셨다. 우주에 나 혼자 남겨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