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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um Jan 27. 2023

사랑하는 감정에 관하여

깨어났을 때

나는 사랑이 인간의 배설욕구라고 생각해 왔어요. 줄곧 그랬습니다. 그래서 사랑 따위를 미화하는 로맨틱코미디, 연애소설, 웹툰 같은 건 철저히 외면하고 살아왔습니다.


보통은 여기까지 쓴 다음에 "하지만 그 사람을 만나고 내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라며 이야기가 시작되겠지만 이 글에 그런 반전은 없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어떤 사람에게도 그 어떤 반전을 체험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런 제가 호기심에 이끌려 그 호기심을 사랑이라고 믿게 되었을 때 저에게 나쁜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를 그렇게 만든 당사자는 일이 있은 직후 잊으라 쉽게 말하였지만 저는 그러질 못했고, 한동안 지옥 불구덩이에 사는 것 같은 끔찍한 기분으로 하루 하루를 버텼습니다. 저에게는 그런 괴로운 경험은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사실 몇 번을 겪는데도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일이지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심플하게 말하자면, 해당인이 전 여자친구에게 환승을 했어요. 해당인은 저와 만날 때 몇 번 전 여자친구에 대해 좋지 않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여자의 과도한 집착, 본인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경험들에 대하여. 하지만 운을 띄워 궁금증만 유발할 뿐,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에 대해서 물을 때면 입을 다물곤 했습니다.


그래요. 해당인이 이런 말들을 할 때 거기서 멈춰야 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정상은 아니잖아요. 그저 그 사람과 있었던 일들을 사실 그대로 친구나 지인들에게 이야기했을 때, 이들은 그런 사람을 만나는 제가 미친 사람이라며 당장 그만두라고 저를 말리고는 했어요.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는 영화가 있습니다. 하지만 제 경우는 호기심만으로 일어난 일은 아니었습니다. 호기심을 그저 호기심으로만 남긴 채 객관적 타자로서 해당인을 관찰만 했더라면 타격이 없었겠지요. 그러나 저는 호기심을 사랑이라 믿고 해당인의 단점을 포용해 손잡고 함께 하면서 해당인이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꿈을 꿨습니다. 한 발 더 나아갔던 그날의 선택에 대해 저는 두고두고 후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그 해당인이 환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까요? 이것도 참 기가막힌 이야기입니다. 해당인이 환승한 전 여자친구가 저에게 연락을 했어요. 해당인의 폰을 빼앗고 뒤져서 제 번호를 알아낸 후, 해당인이 가장 행복할 때 찍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과거의 사진들을 몇 장 보내며 "저 몰라요?"라고 당돌하게 물어보던 그 여자 덕분에 알았습니다. 정확히 저와 헤어지고 이틀 후 아침에 있었던 일입니다. 게다가 그 전날 둘은 함께 밤을 보냈습니다. 즉, 저와 헤어진 바로 다음날 전 여자친구에게 환승을 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일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지만 뭐라도 하고 싶었어요. 한동안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고, 잠도 제대로 못 잤으며, 정신적으로 많이 피폐해졌어요. 이전에도 이별을 경험한 적은 있었지만 그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적은 없었습니다. 저는 시각적 이미지에 약합니다. 잔인한 영화는 결코 못 보고, 특히 전쟁영화에는 취약합니다. 누군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 그 일들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사실, 그런 것들의 잔상이 남들에 비해 꽤 오래 남습니다. 가끔 잔인한 묘사나 전쟁을 소재로 하는 책을 읽기는 하는데요. 책에서는 그런 장면들을 적당히 걸러내면서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소화하는데 시각적 이미지는 그러질 못하잖아요. 제가 본 사진은 제가 한때 사랑이라 믿었던 해당인과 전 여자친구의 섹슈얼한 연출컷이었습니다. 제가 젠틀하다 믿었던 해당인은 전 여자친구에게 혀를 길게 빼내밀고 있었고, 사진 속 전 여자친구는 치아를 다 드러내보이며 고개를 뒤로 젖히고 천박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그것 말고도 그 전 여자친구는 두 사람이 키스하는 사진도 저에게 보냈습니다.


혹시 이 글을 통해 제가 받은 충격을 짐작하실 수 있을까요? 솔직히 이 글을 읽을 누군가에게 공감받고 싶습니다. 저는 이 일을 글로 쓸 수 있게 되기까지도 꽤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가만히 있는 일분일초가 고통이라 뭐라도 해야 했어요. 집에서는 바삐 집안일을 하고, 홈트레이닝을 하거나 일을 끊임없이 했으며 늦은 새벽 하릴없이 밖에 나가 몇 시간을 걸어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 일이 있기 전의 저는 책도 꽤나 많이 읽고, 주말마다 미술관에 가면서 형이상학적 세계와 철학적, 언어적 유희를 탐미하던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그 일이 있고 나서는 그 어떤 정적인 활동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진 속 두 사람의 이미지와 나를 비웃는듯한 고개를 젖힌 천박한 여자의 웃는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으니까요. 그래서 한동안 헬스와 폴댄스에 빠져있었고 패러글라이딩, 펜싱, 서바이벌 등 몸을 움직이는 활동들 위주로 취미생활을 가졌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는 예전의 취미인 독서도 전혀 하지 않았고, 미술관에도 가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게 끝이냐고요? 그랬다면 저는 여전히 너무나 괴로워서 이 글을 쓸 수 없었을 거예요.


저는 제가 겪었던 일을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온 힘을 다하여 해당인에게 그의 상처와 역린을 건드리는 말들을 쏟아냈습니다. 그 말들을 쏟아내는 시점에는 이미 해당인과 전 여자친구의 관계는 파탄 나있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뻔히 예상되는 상황이었어요. 사실 이 일은 단순합니다. 해당인은 저와 헤어진 후 외로워서 하룻밤이나 때울 겸 전 여자친구를 찾아갔습니다. 해당인에게 미련이 남아있었으며 질투에 눈 먼 전 여자친구는 제게 보복이라도 하듯 그런 짓을 한 것입니다. 그런다고 그 둘이 행복해지지 않을 것은 물론 알았겠죠. 이전에도 그들은 몇 번씩 1주, 2주 이렇게 짧게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아무튼 이미 파탄난 관계였으며 저는 그 폐허가 되어 집착과 욕망만 남은 관계의 클라이맥스에 운나쁘게 휘말린 겁니다. 저는 그의 상처와 역린뿐 아니라 카톡으로 저 누군지 모르냐고 묻던 당돌한 해당인의 전 여자친구에게도 하고 싶은 말들을 쏟아냈습니다. 이미 끝장난 관계를 붙잡고 질질 끌며 본인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고 있었을 그 여자의 상처를 건드리는 말들을 했죠.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해당인의 전 여자친구가 제게 보낸 사진을 SNS에 포스팅했습니다. 둘은 거의 동시에 연락하여 이건 범죄라 하더군요. 뭐, 그럴지도요. 법적으로 그들이 제게 한 짓을 다툴 수 있었다면 저도 진작에 그렇게 했겠죠. 온갖 불법적인 일들을 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부숴버린 학교폭력 가해자들을 직접 처벌하는 드라마 더글로리 여주인공의 심정이 이해가 되더군요.


저는 권선징악이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이 끔찍하고 빌어먹을 세상에 권선징악이 존재한다는 말 자체가 폭력이죠. 하지만 인과응보라는 말은 좋아합니다. 죄를 지은 자는 반드시 어떤 식으로 건 벌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그동안 살면서 타인의 사례로 쌓인 경험치에 의한 확신입니다. 저는 아마도 직접 인과응보를 행하여 그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나 봐요. 그런데 문제는 말입니다, 그 복수가 그리 통쾌하지 않다는 겁니다. 조금 더 계획적으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조금 더 철저하게 준비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저 몇 마디 욕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거든요. 감정에 압도되면 사람은 실수를 합니다. 보다 철저하게 치밀하게 이성적으로 준비해야 실수 없이 깔끔하고 완벽하게 일처리를 할 수가 있겠죠. 결국 이 일은 상호 간의 적당한 사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어차피 지난 일이니 이제는 저도 제 인생을 돌아보고 멋진 삶을 살아야죠.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려야지 언제까지 손에 꼭 붙들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솔직히 할 만큼 하니까 놓게 되더라고요.


저는 사랑이 인간의 배설욕구라고 생각합니다. 줄곧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래서 사랑 따위를 미화하는 로맨틱코미디, 연애소설, 웹툰 같은 건 앞으로도 전혀 볼 생각이 없습니다.



자, 지금까지. 제가 어제 꾼 악몽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현실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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