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감자탕을 싫어하는 나
감자탕은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다.
나와 동생과 엄마, 우리 세 가족의 외식메뉴는 언제나 감자탕이었다. '감자탕 먹을까?'라고 묻는 엄마와, 다른 걸 먹자던 동생. 초밥은 어때? 갈비는? 소곱창은? 나와 동생의 여러 제안에 엄마는 '그건 가성비가 떨어지잖아' '그거 먹으려면 수유까지 가야 되는데 너무 멀어서 안돼.' '그건 영양가도 없고 비싸기만 하잖아.' '속 느글거려서 싫어'등... 감자탕이 아니면 안 되는 이유로 답하곤 했다. 결국 우리는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어 편하게 이동할 수 있고, 가성비도 좋고 영양가도 풍부한 감자탕을 먹으러 갔고, 어느 순간부터는 엄마가 감자탕을 먹자고 하면 아무 말 없이 집을 나서게 되었다. 내가 감자탕을 싫어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나는 감자탕도 싫지만, 감자탕 집도 싫어한다. 우리가 늘 가던 그 집은 앉기 전부터 이미 앉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맛집이라는 그곳은 늘 시끄러웠고, 앞 뒤 사방에 깔린 테이블에서 소리 지르며 술잔을 부딪히는 아줌마 아저씨들의 소음과 술냄새 때문에 귀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다. 바닥에 눅눅한 방석을 깔고 억지로 앉아 무표정으로 살코기 발라내기에 집중하고 있노라면 왜 그렇게 살코기는 발라지지 않는 건지. 뼈는 엄청 크고, 붙어있는 고기의 양은 너무 작은 데다, 발라먹다 보면 티셔츠에 국물이 방울방울 튀는 실속 없고 먹기 불편한 감자탕. 감자탕 집에 갈 때마다 나는 매번 후회했다. 차라리 외식을 안 하겠다고 할걸. 집에서 라면이나 끓여먹을 걸 하고. 그렇지만 그곳에서 가장 싫은 건, 엄마가 감자탕을 거의 먹지 않는다는 거였다.
오늘은 감자탕이나 먹으러 갈까?
심심한데 감자탕이나 먹을까?
아, 감자탕 먹고 싶다.
이렇게 걸핏하면 감자탕을 먹자고 노랠 불러대고 외식 메뉴를 정할 때도 감자탕을 고집해 엄마 때문에 억지로 온 건데, 엄마는 정작 음식이 나오면 고기의 대부분을 발라내서 나와 동생의 접시 위에 얹어주고는 본인은 뼈에 달라붙은 소량의 고기와 야채 등을 건져 밥과 함께 조금 먹고 금세 젓가락을 내려놓곤 했다. 그만 발라주고 엄마 먹으라고 말해도 엄마는 알았다고 말하고는 돌아서서 고기를 발라서 내 접시에 얹어줬다. 제대로 먹지도 않을 거면서 굳이 왜 오자고 한 건지... 난 감자탕 집에 갈 때마다 매번 가슴이 답답해져 뛰쳐나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나 원샷하고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하루는 이런 생각을 했다. 엄마는 언제부터 감자탕을 좋아했을까? 아빠랑 데이트를 하던 시절에도 걸핏하면 감자탕을 먹자고 했을까? 물어볼까도 싶었지만, 한 번도 물어본 적은 없다. 굳이 뭐 이런 쓸데없는 걸 묻나 싶어 매번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엄마의 일상은 단순하다. 평일에는 부동산에 출근해 일을 하고, 토요일과 일요일 오전에는 등산을 가며, 일요일 오후에는 목욕탕에 간다. 목욕탕에 가서 온탕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천국에 있는 것 같다는 엄마였다. 얼마 전에는 엄마가 그렇게 칭찬하는 그 목욕탕의 정체가 궁금해서 한번 가봤는데, 너무 좁고 시설이 노후하고 바닥이 미끌거려서 얼른 샤워를 마친 후 머리도 안말리고 빠져나왔다.
그때 나는 겨우 이런 곳을 천국이라고 말하는 엄마의 삶이 슬퍼서 눈물이 났다. 20대에 결혼한 엄마는 남편을 잃을 때 고작 나보다 한 두 살 많은, 마흔도 안 된 어린 나이였다. 아빠는 큰고모에게 5천만 원을 빌려줬는데, 큰고모는 아빠가 돌아가신 후 그 돈에 대해 할머니에게 갚겠다는 한마디만 남기고는 입을 닫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큰고모는 그 돈을 갚지 않았다.) 그 외에 아빠가 남긴 돈은 사망 보험금 몇 천만 원이 전부였다. 아빠의 사망보험금을 달라는 할머니를 완강히 뿌리치고 시댁에서 뛰쳐나와 가장이 된 엄마는 그때부터 근검절약이 몸에 베인 생활을 했다. 난 나 하나 책임지기도 힘든데, 엄마는 본인을 포함해 세 명의 목숨을 책임지며 20년을 버텼다. 아주 작은 휴식에도 감사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엄마의 소박함 이면의 곤궁함이 얼마나 힘들고 불안한 것이었을지, 난 이제와서야 조금은 알겠다.
내게 엄마의 희생은 늘 목에 걸린 가시 같았다. 누군가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고 나를 살렸다는 것이 나에게는 고통이었으니까. 난 누가 사줘도 잘 안 먹는 감자탕이 엄마에겐 최고의 음식이며, 누가 쿠폰을 줘도 안 갈 목욕탕이 엄마에겐 최고의 휴식인 게 슬펐다. 또, 매번 똑같은 등산길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걸로 겨우 소풍 가듯 즐거워하는 엄마를 볼 때 나는 변상 불가한 죄책감을 느끼곤 한다. 엄마의 삶이 감자탕, 등산, 목욕탕이라는 몇 가지 단어로 귀결되는 동안 나는 다양한 취미와 관심사를 가진 서른여섯이 되었고, 엄마의 나이는 육십을 넘겼다. 세월은 잔인하고, 시간은 과거를 보상하지 않는다. 엄마의 육신은 점차 쇄약해져가는데, 나는 가끔 용돈을 주거나 같이 여행을 가는 것 말고는 내가 엄마를 위해서 뭘 할 수 있을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종종 한다. 나와 동생이 없었다면 엄마의 인생은 훨씬 자유롭지 않았을까? 하고. 엄마는 오래전부터 부동산 일을 했는데, 사회생활도 제법 잘하고 수완이 좋아 그럭저럭 먹고살 만큼 돈을 벌 수 있었다. 아니 실은 여자치고는(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감안한다면) 정말 돈을 잘 버는 편이었다. 그러니까, 아마 나와 동생이 없었더라면 엄마는 어쩌면 본인이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차곡차곡 모아 해외로 여행도 가고 연애도 하고 새로운 꿈을 꾸면서 자유롭게 제2의 인생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이제 와서 그렇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엄마는 나와 동생이 있는 지금의 삶과 그 기회중 무엇을 선택할까. 이런 생각들을 나는 꽤나 여러 번 해왔는데, 어쩌면 언제부턴가 내가 결혼을 꺼렸던 근본적인 원인이 여기에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 상상속에서만 존재하는 엄마의 청춘. 나는 그것이 늘 그립고 아쉽다. 내가 하고 싶은 건 엄마가 지금부터 당장이라도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온전한 자유를 주는 것인데, 겨우 내 인생 하나 책임지는 것도 버거운 나에겐 엄마가 원하는 만큼 쓸 수 있는 큰돈을 매달 턱턱 쥐어 줄 만큼의 능력은 없다. 다만 그저 내년, 내후년에는 내가 조금은 더 돈을 벌고 부지런히 내 몫을 해내며 중심을 잘 잡고 살아가고, 부디 엄마가 오래오래 건강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