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치의 인생

네이버 지도 없으면 집에 못 가는 바보

by Kyum


일곱 살 때 할머니와 같이 세탁소 할머니네 놀러 갔었다. 세탁소 할머니는 할머니의 사촌으로, 도농동에서 제법 크고 장사가 잘 되는 세탁소를 운영하셨다. 세탁소에서 두 블록쯤 떨어진 곳에는 세탁소 할머니 부부가 사시는 일층짜리 주택집이 있었는데 그 집은 마당이 없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볼품없었지만 막상 들어가면 앤티크한 가구들과 한가득 쌓여있는 비싼 소품들 위로 햇살이 쏟아져 반짝반짝 거리는 근사한 곳이었다. 그 집에서 나는 마리앙뜨와네뜨 시대에 만들어졌을 것 같은 수납장을 열고 알록달록 신기한 보석과 머리핀 같은걸 구경하면서 즐거워했었다.


세탁소 할머니의 남편은 다른 사업을 했는데, 듣기로는 그 사업도 제법 수완이 좋았다. 세탁소 할머니는 내가 그 집에 놀러 갈 때마다 내 손에 만 원짜리 한두 장을 꼭 쥐어주곤 하셨다. 시장에서 가수들 노래를 불법으로 녹음한 짭 테이프를 개당 천 원에 팔던걸 생각하면 만원은 미취학 아동에게 꽤나 큰돈이었다.


나는 그 집에 가는 걸 좋아했다. 그날도 할머니 손을 잡고 그 집에 갔다. 해가 정수리로 작살처럼 내리 꽂히는 아주 더운 계절이었다. 세탁소 할머니는 집에 갈 때나 되서 내 손에 용돈을 쥐어주셨는데, 그날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으셨는지 도착하고 얼마 안되서 만원을 주며 길건너 슈퍼마켓에서 아이스크림 세 개랑 먹고 싶은 과자를 고른 뒤 남는 돈은 용돈으로 쓰라고 하셨다. 나는 나가자마자 세탁소 할머니가 말한 슈퍼를 한눈에 알아봤다.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먹을 생각에 신이 나서 직감적으로 움직였던 것 같다. 왠지 저기 있을 것 같은데? 하고 성큼성큼 가보니 슈퍼가 있었다. 세탁소 할머니네서 엎어지면 코닿는 거리로, 가는데 오분도 채 안걸렸을거다. 신중하게 먹을 것을 고른 뒤 계산을 마치고 아이스크림과 과자가 들어있는 까만 비닐 봉지를 빙빙 돌리면서 가게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아뿔싸. 그 집이 어디있었는지가 기억이 안나는 거다... 아. 문색깔 보고 찾아가면 되지. 근데 문이 파란색이었나? 초록색이었나? 아니. 빨간색이었던거 같은데. 큰일났다.


요즘 같으면 전화라도 했겠지만 그때는 핸드폰도 없고 있는거라곤 오로지 집 전화 뿐이었다. 나는 세탁소 할머니네 전화번호를 몰라서 공중전화를 걸 수도 없었다. 슈퍼로 돌아가 공중전화로 집에 전화를 걸어봤다. 누군가 받으면 할머니의 전화번호부에서 세탁소 할머니네 번호를 알아내려고 했는데, 신호음만 계속 이어질 뿐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들 외출한 것 같았다. 일단 무작정 찾다보면 어딘지 알아보겠지 싶어 길을 건넜다. 근데 갑자기 헷갈리기 시작했다. 아까 내가 길을 건넜나? 안건넌 것 같은데. 아니. 건넜어. 근데 여기서 건넌 게 맞나? 나는 두리번거리며 자꾸 낯선 골목으로 들어갔다. 세탁소 할머니네 가까이 가려고 하면 할 수록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삼십 분을 헤매고 난 뒤 기진맥진해서 나는 골목길에 멈춰서버렸다. 그 사이 아이스크림은 다 녹아서 액체가 되었고, 새까만 비닐 봉지를 꼭 쥔 손아귀에서는 기분 나쁜 땀이 비죽비죽 솟아올라 미끌거렸다. 썬크림을 바르지 않아 얼굴이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뜨거운 날씨였는데도 길을 잃은 공포에 등골이 오싹했다.


낯선 상황에서 길을 잃은 일곱살 꼬마가 멘붕일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 나는 그것을 했다. 엄마. 아빠. 할아버지. 심지어 세탁소 할머니까지 목놓아 부르며 나는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다. 근데 어떤 아줌마가 다가왔다. 누가 내 공포를 알아주니 서러워서 더 엉엉 울었다. 그때였다.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달래는 아줌마 등 뒤로 멀리서 할머니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뛰어오는 게 보였다. 아이구 인석아. 어디갔었누. 할미가 걱정했잖여. 라며,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눈물을 닦아줬다. 얼굴이 엉망이 된 나는 창피함에 고개를 푹 숙이고 세탁소 할머니네 댁으로 돌아갔다. 내가 발견된 그곳은 세탁소 할머니네 집이 있는 골목의 옆 골목으로, 세탁소 할머니네서 걸어서 오분이면 갈 수 있는 곳에 있었다.


그날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엄마는 내가 참 맹하다며 웃었다. 억울했다. 일부러 헤맨 것도 아닌데 나를 바보 취급하는 엄마가 미웠다. 그런데 요즘도 가끔 약속 장소 근처에서 길을 헤매다 늦었다는 나에게 껄껄대며 '여기 찾기 엄청 쉬운데.'라고 말하는 친구를 보면 그때처럼 억울하고, 가끔 화도 난다.


나는 길치다.


매일 가는 길 말고는 잘 찾아가지 못한다. 매일 가는 길도 동선이 살짝 바뀌거나 출발지점이 조금만 달라지면 반드시 헤맨다. 자주 가는 동네 단골 식당조차도 네이버 지도 없이 가려면 꼭 헤맬 정도다. 그래서 늘 어딘가를 갈 때는 처음부터 지도를 켜 두고 실시간으로 보면서 가는게 습관이 되었다. 네이버 지도, 구글 맵. 그런 문명의 혜택이 없었다면 나는 해외건 지방 어디건 낯선 곳을 혼자 여행하는 일은 꿈도 못 꿨을 거다. 혹시 길인지 능력에 장애가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새로운 길을 찾는 능력,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능력마저도 아예 없다.


2000년대 중반까지 스마트폰을 쓰지 않았는데 그때는 어디 찾아갈 일이 있으면 집에서 지도를 프린트해서 두 시간씩 일찍 나와서 약속 장소로 갔다. 목적지 근처에 큰 건물이 있거나, 목적지가 이름을 들었을 때 알만한 유명한 곳이면 사람들에게 물어봐서 갔다. 근데 사람들이 길을 잘 모르거나, 잘못 알려주거나 그럴 때면 반드시 헤매다가 약속시간인 정시에 도착했다. 그렇게라도 찾으면 다행이었다. 도착 장소에 가서는 사람들에게 굳이 두 시간 일찍 나와서 지금 도착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었다.


나의 길치력과 관련된 일화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지만 전부 소상히 적을 수는 없으니 두 가지 정도만 써보자면, 대학교 방학 때 한 번은 물건을 포장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었다. 근데 역 앞에 있는 가게였는데 못 찾아서 빙빙 돌고 헤매다가 한 시간 늦었고, 불성실한 이미지로 찍혀서 당일날 해고당했다. 당연하지. 한 시간이나 늦었는데... 또 하나는 고등학교 때 혼자 옷을 사러 명동에 갔었다. 혼자 가기 전 주에 친구랑 갔다가 마음에 드는 매장이 있었는데 그때 고민하다 안산옷이라 다시 구경해보려고 갔던 거다. 근데 못 찾았다. 기억을 되살려서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이상한 골목으로 빠졌다. 두 시간 정도 헤맸는데 계속 왔던 길만 뱅뱅 돌고 있었다. 괜히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경험상 부정적인 감정이 앞서면 해결되는 일이 없다. 그런데 길을 헤매면 불안하고 화가 난다. 그러면 길을 더 못 찾는다. 길을 더 못 찾으면 불안하고 무섭다. 가끔 이렇게 악순환의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무작정 걷다 보면 목적지도 잊은 채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었다. 물론 요즘은 네이버 지도가 있어서 그러지 않지만.


네이버 지도를 쓸 수 있는 스마트폰 배터리를 지키는 건 나에게 생존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다. 그럼에도 부주의해서 배터리가 나간 적이 몇번 있었다. 한 번은 낯선 곳에서 역으로 가려던 길에 폰 배터리가 끊겨서 지하철 역이 나올 때까지 이정표를 보며 걷기로 했었다. 삼십 분쯤 걸어도 안 나오길래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가까운 지하철역을 물어보니 이미 한참 지나친 뒤였다. 오는 길에 못 봤는데 대체 어디 있는 거냐고 투덜대며 돌고 돌아 한 시간 만에 시청역에서 종각역에 도착했었다. 또 한 번은 후쿠오카에 혼자 여행을 갔었는데, 신나게 돌아다니고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스마트폰 배터리가 방전되기 직전이었고 심지어 보조 배터리도 방전 직전인 거다. (로밍을 하면 배터리가 빨리 닳는다는 걸 몰랐다.) 그때가 오후 네시인가 그랬는데 아직 해가 쨍쨍했지만 숙소에 돌아갈 길이 막막했다. 일본은 갑자기 해가 지고 어두워진다는 여행후기도 생각이 나고... 그래서 남아있는 배터리를 활용해 서둘러 지하철을 타고 호텔로 돌아갔던 게 기억이 난다. 그날의 일정은 그걸로 끝. 폰과 보조배터리를 완충하고 나오니 근처 음식점들이 다 문을 닫아서 나는 그냥 편의점에서 이것저것 사서 대강 먹고 일찍 잤다.


한때는 언젠가 내가 길치인 것에 익숙해지게 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낯선 곳에서 길을 헤맬 때면 나는 요즘도 일곱살때처럼 엉엉 울고 싶다. 가보지 않은 낯선 곳에서 관광안내지도 한번 쓱 보고선 네이버 지도나 구글 맵 없이 척척 잘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부럽다. 그런 능력은 아마 타고나는 거겠지. 내가 길치이듯 그들이 길 능력자인 건 우리가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인 거다. 나도 그들처럼 길을 잘 찾고 싶지만 아마 피나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할 것 같다. 근데 피나는 노력을 안하고 있으니 아마 안되겠지. 길을 못 찾는 바람에 발견하게 된 소소한 기쁨, 길치만이 느낄 수 있는 길 위의 미학. 이런 거 전혀 없다. 길치에서 벗어나고 싶다. 불편하다 정말. 길치탈출훈련, 길치극복캠프 이런거 있으면 받고 싶다. 근데 없다. 아. 나는 왜 길치인가!


2015.09. 길 잃을까 봐 투어버스 타고 갔던 유후인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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