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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온 Oct 02. 2021

힘낼 힘이 없어서


어김없이 주말이 찾아왔다. 금요일 저녁에 갈까? 토요일 오전? 토요일 오후?

엄마한테 언제 가야하는지 고민이 시작된다. 매주 엄마를 보러 가는 것이 의무가 아닌데 내가 나에게 내 준 숙제처럼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두달만에 엄마를 보고 온 지난 추석. 하와이에서부터 시애틀까지 태양에 잔뜩 그을린 내 피부와 대조적으로 엄마는 정말 우유에 푹 담긴 백설기마냥 뽀얀 얼굴이었다.

해외에서 입국한지 2주가 지나지 않아 아빠와 언니의 도움으로 엄마가 밖으로 나오셨다. 엄마를 밖으로 나오게 하는 일이 엄마한테도 그걸 돕는 사람에게도 얼마나 번거롭고 힘든 일인지 알기에 공원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내내 마음을 졸였다.

겨우 10분. 정말 딱 10분을 봤다.

나 잘 다녀왔어. 엄마 잘 지냈어? 너무 즐거웠어. 이거 봐봐 엄마. 엄마 가을이 아기는 아들이래. 엄마. 엄마. 엄마.

엄마로 시작되는 나 혼자만의 대화를 십분동안 한참을 늘어놓다가 바람이 쌀쌀해 혹여나 감기걸릴까 걱정하는 아빠의 말에 다시 인사를 했다.


지난 어버이날에 엄마와 아빠와 함께 쓰고 싶어서 선물한 책이 있었다. 부모님이 뭘 좋아하시는지,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예전의 백문백답같은 그런 책이었는데 그 중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에 '쌀밥, 된장국, 멸치볶음'이 있었다.

아빠가 좋아하는 건 우리의 일상이었다. 우리집 식탁엔 늘 흰 쌀밥이 있었고 엄마가 틈틈히 만들어놓으신 밑반찬들이 있었다. 시금치나물, 연근조림, 멸치볶음 이런 것들과 별일 없으면 늘 끓여주시던 외할머니 된장으로 만든 된장국. 언젠가는 엄마의 밥을 못 먹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과정이 이렇게 아프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남자친구에게 약간 집착하듯 엄마가 무엇을 준비해주시는지 묻곤 했다. 나도 엄마 밥이 먹고 싶어서. 그 기분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싶어서 오늘은 뭘 먹냐고 묻는다. 그는 대답했다. 오늘은 삼겹살. 오늘은 샤브샤브. 오늘은 치맥.


그리고 동태탕.

엄마가 부엌에 서계셨던 모습이 떠올랐다.

동태탕에 왈칵 눈물이 터졌다.


남자친구의 '동태탕' 그 세글자를 듣자마자 나의 어린시절, 엄마가 부엌에 서계신 모습들. 그냥 그냥 너무 자연스럽고 평화로웠던 그 일상들이 지나갔다. 이제는 그 일상들을 더이상 누릴 수도 없고 새로운 일상에 적응하기도 전에 너무 많은 변화가 나를 할퀴어 적응할 힘조차 내버려 두지 않은 것같이 느껴졌다.




"오늘 언제 오는데?"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점심은 드셨어요? 응 먹었다.

아빠 뭐하세요? 텔레비전 본다.

저 회사에서 몇일 전부터 새로 일이 있어서 요 몇일 바빠가지고 오늘까지 마무리 하고 내일 가려구요.

물론 일이 바쁜건 맞는데 사실 핑계다. 그냥 오늘은 무서운거다. 아빠는 늘 내가 하는 말이면 다 오케이니까.

응 그래 알았어. 한참 아빠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아빠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아마 12월쯤이나 그때는 너희한테 해야할 이야기가 있을거야"

"아빠 그냥 지금 하세요"


아빠는 조심스럽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게 말을 꺼냈다. 엄마의 병원비. 간병비. 엄마에게 들어가는 돈과 아빠에게 남은 돈이 얼마인지. 엄마의 병은 현대 의학으로는 절대 나을수가 없다며 엄마를 맡았던 모든 교수님들이 그랬다. 계속해서 밑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는 형태로 우리는 4년이 넘게 지내왔다. 요양병원은 절대 보낼 수 없다며 24시간 간병인을 고용해서 재활병원에서 엄마를 모셨다. 언니도 나도 서울에서 매주 전주에 내려가 엄마와 함께했다. 마음 아픔 앞에서 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버티고 살아왔는데 아빠는 이제 결정을 해야할 시기가 찾아왔다고 느끼셨나보다.


아빠의 목소리를 들으며 숨죽여 흐느꼈다 전화가 끊키자마자 소리내며 울었다.

괴로웠다. 언니와 내가 함께 엄마에게 드는 돈을 낸다면 우리는 아마 몇년은 더 이렇게 버틸 수 있을거다. 아니 계속 버틸 수 있을거다. 그런데 문제는 얼마나 버텨야할지 모른다는거다. 엄마의 병이 나아서 그때까지만 버티라고 한다면 뭐든. 내 모든걸 팔아서라도 버틸텐데. 1년이 될지, 5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나의 삶을 포기하고 아빠처럼 엄마를 위해서만 사는 삶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내가 이렇게 불효녀였나. 내가 이렇게 이기적이었나.

요양병원에는 보내고 싶지 않았는데. 거기선 엄마가 외로울거 같은데. 죽어가는 기분일거 같은데 하고 그동안 그렇게 반대해왔다. 그치만 이미 요양병원에 가지 않아도 엄마가 버티는 힘이, 우리가 버티는 힘이 그리 강하지 않다는 것을 자꾸만 깨닫게 된다.




건강하게 챙겨 먹고 있는데도 뭘 먹기만 해도 소화가 안되고 열이 나고 어깨의 통증은 무엇을 해도 사라지지 않는걸 보니 한국에 돌아오니 다시 엄마 걱정이 시작되는가보다. 도망가고 싶은데 도망갈 곳이 없고 잊어버리고 싶은데 잊혀질수가 없어 사라지고 싶다는 말을 또 해버렸다.

'너무 우울하게 생각하지마.'라는 말에 울컥했다. 그 뒤에 '열심히 하고 있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거 알아. 잘하고 있어'라고 덧붙였지만 애꿋은 사람에게 큰 소리를 내버렸다.

"나 지금 정말 열심히 하고 있었단 말이야. 밥도 잘 챙겨먹고 앞으로 뭐하고 살지 힘내서 생각도 하고 운동도 하고 일도 열심히 하고 있단말이야." 차마 잇지 못했던 말.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도 너무 슬프고 마음이 아파서 아무것도 하고싶지 않아. 도망치고 싶어 어린 아이처럼 투정 부리고 홀로 엉엉 었다. 나의 안식처가 되어주는 그가 보고 싶어서 당장 내일모레 떠나는 항공권을 한번 다가 다시 브라우저를 닫았다. 그래도  오랜 친구였던 여기에 찾아와 눈물과 함께 마음을 털어놓아본다.


글을 다 쓰고나니 부끄러워진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도 있을 텐데. 내가 뭘 했다고 이런 생각도 들고.

내가 이렇게 부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나 지워버리고 싶어진다. 그래도 이런 나까지 내가 챙겨줘야지 어떡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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