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두려워도 봄은 아름다운 게 맞다
분명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코트를 입었는데 이젠 기모 후드를 입는 것조차 덥게 느껴진다.
골목 담벼락 끝에는 개나리가 언제 이렇게 활짝 피었는지 고개를 휙휙 돌리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봄들이 인사를 하고 있다.
1년이 지났다. 내 생에 그렇게 추웠던 봄날이 또 있었을까.
봄이 찾아올까 기대하던 그때에 엄마는 중환자실에 가셨고 그 후로 나는 두 달간 엄마 옆에 머무르며 보호자를 자처했다. 전문 간병인이 있어 굳이 보호자가 있지 않아도 되는 시간에도 나는 무슨 마음으로 그렇게 엄마 옆을 지켰을까.
엄마가 계시던 대학병원 화단에는 꽃들이 참 많았다. 하얗게 눈부시던 벚꽃도 있었고 봄이 다 끝나갈 때까지 화려함을 뽐내던 겹벚꽃도 초등학교 화단 같이 느껴지던 팬지꽃도 있었다.
우리에게 제철 과일을 몇 종류씩 매일 먹이시더라도 엄마의 주방에 아름다운 꽃을 꽂아두는 일은 쉽게 하지 않으셨다. 당신을 위한 일들은 사치라고 느끼셨지만 그럼에도 꽃이 집에 들어오면 그 어느 때보다도 기쁘게 식탁 위를 장식해놓으셨다. 그래서인지 나도 꽃을 참 좋아했다.
엄마는 말을 할 수도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병실 안으로 꽃을 들일 수도 없는 노릇. 엄마와 꽃을 보러 나가던 그날은 내 수능날보다 더 비장했다. 엄마의 이동용 벤틸레이터를 무릎 위에 얹고 그 위엔 소변주머니를 검은 봉지에 감아올렸다. 꽃은 만개했지만 여전히 바람을 차가웠기에 엄마를 발끝부터 턱 아래까지 온갖 담요로 두르고서야 우리는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한 달 내내 병실에 누워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던 엄마를 자리에 앉혀 그 혼잡한 응급실 복도를 빠져나와 밖으로 나가는데 내 마음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엄마를 밖으로 모시고 나간다는 걱정이 가장 컸고 그다음엔 착잡했다. 당연하게 느끼고 사는 숨쉬기, 말하기, 걷기 이런 것들이 이제는 특별한 일이 되어버린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렇게 많은 봄을 맞이하고 살면서 단 한 번도 특별한 계절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평생 기억에 남을 날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사진을 찍었다. 우리 가족 중에서 세수도 안 하고 양치도 안 하고 밖에 슬리퍼 차림으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였다.
다른 사람의 손으로 고양이 세수처럼 얼굴을 닦지만, 머리를 다듬을 수 있는 실력이 있는 간병인이 때에 맞춰 커트를 해주지만 그럼에도 엄마의 겉모습은 엄마 스스로의 손을 탄지가 참 오래된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그 모습이 마음 아프게 와닿지도 않았다. 그저 이 봄날에, 엄마에게 꽃구경을 선물할 수 있는 자체가 큰 행복이었다.
오미크론 대유행이 어쩌면 작년 봄을 떠올리게 해주는 걸 그나마 막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 기억의 지난봄은 늘 눈물이었다.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가던 길 바라보던 벚꽃. 잠시 병원 안의 벚꽃길을 산책하거나 혹은 집에 가는 길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길에서 맞이한 꽃들. 아빠가 간병하시는 동안 홀로 벚꽃 길들을 찾아 카메라를 들고 걸어 다니는 것들이 전부였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엄마의 보호자로 견뎌야 했던 그 시린 날들과 나의 착잡한 심정과는 상반되도록 지난해 봄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1년 전엔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 봄이 엄마의 마지막 봄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엄마가 또 한 번 봄을 맞이할 수 있어서 다행이고 감사하고 기쁘다. 하지만 여전히 두렵다.
찬란한 아름다운 계절을 보면서 나는 어떻게든 이 지나가는 시간을 엄마와 공유할 수 있도록 전전긍긍하고 노력하게 될 테고 그러면서 이 봄이 마지막일까 여전히 무서워할 거다.
함께 할 수 있어서 기쁜 마음과 마지막일지도 모를 두려움이 공존하는 봄이 또 시작될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기에 행복한 것과 가졌기 때문에 두려운 것. 좋은 것에 집중하고 살기에도 아까운 시간인 것을 잘 안다. 비단 엄마뿐만 아니라 모든 것들이 다 마찬가지일 텐데도 유독 사랑 앞에서는 이 두 가지 감정이 같은 힘으로 서로 대립한다.
감사함은 정기 구독하는 잡지처럼 느껴진다면 두려움은 그 잡지 사이에 끼워서 보내지는 몇 개월에 한 번 정도 들어있는 특별판 같아 더 눈에 들어온다. 내가 추구하는 본질은 특별판이 아니라 내가 늘 보던 그 잡지에 있는 것일 거다. 봄은 늘 아름답고 설레는 계절이 맞다는 것을. 다가오지 않은, 마음 한편에 새로이 시작된 불안으로 봄의 아름다움을 홀라당 잊어버리는 그런 일은 하지 않기로 노력한다.
잊지 않기로 한다. 부디 두려워지는 순간들이 와도 이렇게 감사함을 다시 떠올려보며 나의 불안을 스스로 잠재울 수 있는 힘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을, 나는 잊지 않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