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라 월요일부터 일정이 두 개나 잡혀 있었다. 눈이 조금씩 내렸고 기분은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
점심 약속을 마치고 휴대폰을 열었다. 아빠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와있었다. 카톡도 아니고 문자메시지.
잠김 화면에서 페이스 아이디를 인식해서 열리던 찰나에 메시지의 내용을 읽지도 않았는데 이유모를 서늘한 바람이 마음을 스쳐갔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 뒤에는 외할머니의 성함이 쓰여있었다.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제 가야 하는지 지금은 어떻게 된 건지 언제 돌아가신 건지 뭔가 내 안에 또 다른 자아가 나와서 내 일을 대신 처리해주는 기분이었다. 저녁엔 회사 사람들과의 일정이 있었다. 고대했던 일정이었기에 케이크를 사러 가는 길이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케이크를 사러 갔다. 구매 대기 줄에 서있는데 누가 내 어깨를 쥐고 앞뒤로 흔드는 것만 같았다.
케이크를 손에 들고 집에 걸어오는데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세발자국 가다가 한번 쉬고서는 콧물을 닦았다. 다시 눈물이 터지면 하늘을 쳐다봤다. 죽음, 상실감 그 이상의 복잡한 감정들이 한 번에 밀려왔다. 한바탕 눈물을 쏟다 보니 이십 분이면 걸어올 길이 한 시간은 걸린 것 같았다. 집에 오자마자 짐을 싸고 왜 샀는지 모를 케이크를 냉동실에 넣어두고 기차를 타러 갔다.
장례 1일 차.
빈소에 들어서니 큰 외숙모의 모습부터 보였다. 외숙모를 껴안았다. 할머니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고 가장 오랜 기간 많은 감정을 공유했을 외숙모. 외숙모는 울지도 않았고 웃지도 않았다. 넋이 나가 있는 얼굴이었다.
우리 아빠는 엄마를 대신해서 상주 노릇을 하고 있었다. 무릎이 안 좋은데도 아빠는 매번 사람들이 올 때마다 외삼촌들과 함께 절을 했다.
외숙모는 옷 두 벌을 내밀었다. 까만 상복. 태어나서 처음 입어보는 옷. 마치 옷을 입는 게 아니라 책임감을 입는 것 같았다. 할머니의 딸인 엄마, 엄마의 자리를 사위인 아빠와 손녀딸인 우리가 최선을 다해 대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날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할머니의 빈소는 시끄러웠다. 활기찼고 사람들이 많았다.
이상하게 장례식장에서 준비한 음식들이 너무 맛있었다. 평소엔 하얀 밥 한 공기를 다 비우는 경우가 없는 데다 장례식장에서는 그저 한두 숟갈 뜨고 내려놓곤 했었다. 그런데 밥을 다 먹고도 따뜻한 수육과 동그랑땡을 더 가져다가 먹고 또 먹고 또 먹고 또 먹었다. 나뿐만 아니라 언니도, 사촌들도 하나같이 밥이 너무 맛있다며 쉴 새 없이 먹어댔다.
여느 할머니들이 그러시듯 우리 할머니도 그랬다. 밥을 다 먹을 때쯤이면 이것도 먹어봐라, 겨우 부른 배를 쉬게 하러 방안에 들어와 다 같이 텔레비전을 보면 하얀 가래떡에 조청, 감이나 배를 깎아 들고 방에 가져다주셨다. 그렇게 하루 종일 먹이려는 자와 먹지 않으려는 자의 기싸움처럼 명절을 보내곤 했다. 그런데 할머니의 영정사진 앞에서는 그렇게 밥이 잘 들어갔다. 계속 배가 고팠다.
할머니 마지막 가시는 길에 손주들이 이렇게 배불리 먹는 모습 보시면서 편안하게 가시라고 그랬던 걸까? 나는 연신 할머니의 마법이라고 했다. 모두가 함께 모여 웃었고 함께 모여 음식을 맛있게 먹었고 할머니를 추억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첫날밤이 저물었다.
장례 2일 차.
오늘은 입관을 하는 날이다. 입관이 어떤 의식인지 모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장례 지도사가 우리 모두를 데리고 내려가는데 셋째 언니가 '긴장돼'라고 말을 했다. 그제야 내 기분을 알아차렸다. 나도 긴장하고 있었다.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만나러 가는 자리였다.
의자들이 줄지어 놓여있는 방과 내가 좋아하는 첩보 수사물에서 자주 보던 스테인리스로 된 두꺼운 판이 보였다. 그 위에 할머니가 누워계셨다. 장례지도사가 할머니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걷어냈다. 질끈 눈을 감고 싶다가도 조금이라도 더 오래 할머니를 눈에 담고 싶은 마음이 교차했다. 무서웠다. 숨이 끊어진 사람을 실제로 보는 경험을 한 적이 없었다.
두려움이 두 가지 색으로 다가왔다. 하나는 시신을 본다는 두려움, 하나는 그게 우리 할머니라서 그래서 할머니를 잃었다는 것을 직시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장례 지도사분들이 할머니의 머리를 감겨드리고 얼굴을 씻겨드리고 분을 칠해드리는 그런 과정 속에 모두가 숨을 죽여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 고요하면서도 분주한 시간을 깨는 처절한 울음이 들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아니 여기 들어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아무 표정 변화가 없던 외숙모가 마치 엄마 잃은 어린아이처럼 흐느끼며 울기 시작하셨다. 그 울음소리에 모두들 참아왔던 눈물들을 입 밖으로 토해냈다.
입관 전 모든 준비를 마친 할머니를 가까이에서 마주하고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시간이 주어졌다. 내가 유일하게 잘하는 말은 '사랑해요' 밖에 없었다. 딱딱한 할머니의 손을 잡고 할머니 사랑해요를 크게 외쳤다. 마지막 순간이니 용기를 내고 싶었다.
외숙모의 울음으로 모두가 소리 내어 울 수 있었던 것처럼 모두가 입 밖으로 마음을 꺼냈으면 했다. 아빠도 할머니께 말했다. '어머니 고생 많으셨습니다. 좋은 곳 가세요.' 외숙모는 '어머니 이제 고생 그만하시고 편하게 쉬세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할머니의 손을 계속해서 어루만지며 다리를 붙잡고 흐느꼈다. 그만해야 하는 순간이 왔는데도 우리는 그만둘 수가 없었고 외삼촌과 우리 아빠의 이제 그만 하자는 말을 듣고 겨우 뒤로 물러섰다.
수의를 곱게 입은 할머니를 꽃으로 장식한 정말 예쁜 관에 눕혔고 이제는 천국 가는 길에 쓰시라고 노잣돈을 올리는 시간이라고 했다. 다시 할머니를 마주했다. 어쩜 이렇게 예쁜 관에 누워계실까. 평생 고생만 하시던 우리 할머니, 이렇게 예쁜 꽃을 할아버지 만나러 가는 길에 들고 가시네. 할머니의 허리춤에 돈을 꽂고 할머니 귀에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꼭 하고 싶었는데 이 말을 하는 그 순간의 내 감정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숨겨두었던 말이었다.
"할머니 이제 엄마 걱정은 하지 말고 편히 쉬세요."
관이 닫혔고 입관식은 끝이 났다. 모두가 쉼 없이 울었지만 다행히도 여러 가지 남은 절차들이 울음을 싹둑 잘라주었다. 여자들은 오른쪽에 머리핀을 꼽았고 남자들은 완장을 찼다. 빈소로 다시 올라가니 첫 제사를 지냈고 다시 조문객을 맞이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
할머니의 부고를 듣고 마음이 복잡했던 건 바로 엄마에 대한 마음 때문이었다.
올해 초 엄마가 중환자실로 이송된 이후 대학병원에서 두 달간 지내신 적이 있었다.
그 때 할머니께서 엄마를 보고 싶어하셨다. 어른들은 할머니를 말렸다. 코로나로 인해서 병원 건물당 하나의 문만 존재하며 입구에서 QR체크인을 해야하는 그런 과정을 보호자라는 이름으로 여든이 넘은 할머니가 혼자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른들 사이에서 그걸 듣고 있는데 할머니의 굽은 등이 더욱 작게 느껴졌다. 딸이 보고싶은 엄마일 뿐인데 그걸 말리는 어른들이 야속하게 느껴지면서도 또 이해가 되었고 그 앞에서 자신있게 혼자 갈 수 있다고 말을 못하는 할머니도 안타까웠다. 할머니도 혼자 엄마 병실까지 못 찾아갈거라는 걸 아셨다.
그 날 밤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와 엄마를 만나게 하는 계획을 세웠다. 늦은 밤 아빠에게 내 계획을 알리고 꼭 엄마랑 할머니 만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전달하고 잠들었는데 다음날 일어나니 이미 아빠와 외삼촌이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도착했다는 문자메세지가 남아있었다.
아빠 말로는 엄마와 외할머니 둘만 계셨던 그 병실에서 그렇게 두분다 우셨다고 했다. 우리 엄마는 말도 못하는데 말 못하고 누워있는 딸을 보는 할머니의 마음은 어땠을까. 이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그게 마지막이었다.
장례 2일차에는 엄마의 친구들도 많이 찾아오셨다. 엄마가 말로 많이 설명해줬던 낯익은 이름들의 이모들을 처음 보는 순간이었다. 잘 모르는 삼촌들도 나를 보시더니 '너가 00 딸이냐?'라고 하면서 어쩜 그렇게 쏙 빼닮았냐고 말하셨다. 내가 그렇게 엄마를 닮았나. 나는 작은 외삼촌을 보며 우리엄마랑 너무 닮아서 볼 때마다 엄마 생각이 나는데 어른들은 나를 보면서 그걸 느끼시겠다 싶었다.
엄마를 아끼는 많은 엄마의 친구들과 친척들은 우리를 보고 안타까워했고 걱정했다. 말을 길게 하지 않았지만내 손을 잡고, 나를 안아주고, 우리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어른들을 마주했다.
"나는 그럼에도 너네가 이렇게 밝고 건강하게 지내서 너무 좋다"
명절마다 뵙던 삼촌이 울면서 말하셨다. 이렇게 웃으면서 타인을 마주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을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나와 언니가 어른들을 위로했다. 괜찮아요. 괜찮아 지실거예요. 걱정마세요. 얼른 다같이 보고싶어요.
하지만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이 장례식이 머지 않은 미래에 대한 예행연습이 아닐까.
장례 마지막 날.
발인이 있던 날. 새벽같이 빈소에 도착했다. 아침부터 밥 한공기에 라면까지 끓여 언니와 나눠먹었다. 소화제를 먹으면서도 밥을 계속 밀어넣었다. 왜인지 몰라도 밥이 너무 맛있었다. 마지막까지 할머니의 마법이 우리에게 다가왔다고 여겼다.
할머니의 고향으로 향하는 대형 버스는 조용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시간 모두가 버스에서 잠이 들었고 눈깜짝할 사이에 화장장에 도착을 했다.
사실 난 화장장에서의 순서들을 보고 싶지 않았다. 화장 후 유골을 마주하는 순간이 너무 어려웠다. 사람이 뼈로 남고 그 뼈를 한번 툭하고 쳐버리면 가루가 되어버리는 장면을 본적이 있다.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허무함이었다. 그 허무함을 할머니한테서까지 느끼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도 화장이 진행되는 순간 우리는 버스에서 기다렸고 할머니의 유골함을 전해받는 과정말고는 아무것도 보여지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할머니의 마지막을 하얀 고운 가루가 아니라 할머니의 얼굴, 할머니의 손, 할머니의 발로 온전히 기억하고 싶었다.
화장장을 떠난 버스는 엄마의 고향에 도착했다. 엄마의 고향이자 외삼촌들의 고향, 사촌 언니들의 고향인 작은 마을. 이미 포크레인이 흙을 파두고 준비를 해놓고 있었고 다른 삼촌들은 가족들과 인부들이 먹을 식사를 주문해두셨다. 할머니를 모시기 위한 땅이 준비되는 동안 우리는 그 와중에 또 먹었다. 하필 또 동태탕. 내가 가장 먹고 싶어했던 엄마의 음식 중 하나인 동태탕. 덜덜 떨면서 박스를 잘라 부는 바람을 막아내면서 끓여낸 동태탕은 역시나 너무 맛이 좋았다.
할머니의 유골함을 땅속에 묻고 차례차례 흙을 덮는 과정을 거쳤다. 그 후에는 포크레인이 흙을 덮었고 작업하시는 분들이 산소의 형태를 만들어놓고 나니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묘가 완성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또 한번 제사를 지냈다. 얼마만에 이렇게 묘 앞에서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해보는지 까마득한 어린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절을 다하고 일어서는데 누군가 울음을 크게 터트렸다. 막내 손주이자 할머니가 유독 아꼈던 사촌이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사촌의 울음은 할머니의 집 마루에서까지 이어졌다.
어린시절 여름마다 놀러왔던 할머니의 집. 할머니의 옷장에서 발견한 엄마의 흔적들. 엄마가 보고싶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엄마가 안타깝고 이 상황이 너무 짜증이 났다. 내가 초등학생때부터 엄마가 참 자주 하고 다니시던 실크 스카프를 보는데 엄마가 너무 보고싶었다. 엄마가 여기 있다면 어땠을까. 언니와 나는 입지도 못할거면서 엄마와 할머니를 동시에 떠올릴 수 있는 옷가지들을 챙겼다. 할머니가 주무시던 이부자리의 전기장판이 여전히 켜져있었다. 모든 아름다운 기억이 정말 과거가 되어 추억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웠다.
버스로 돌아가는 길 외숙모와 팔짱을 끼고 천천히 걸었다. 외숙모를 위로하고 싶었다. 성질 급하고 고집 센 시어머니 만나서 오랜 시간 같이 살면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했을 외숙모. 그럼에도 그런 시어머니를 떠나보내며 그 누구보다 슬피 울었던 외숙모.
"우리 할머니 복도 많다. 이런 며느리 만나서 참 행복하게 사시다 가셨다. 그쵸." 외숙모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 "자손들 이렇게 잘 살게 해주신게 할머니가 주신 복인거 같아." 참 착한 우리 외숙모. 마지막까지 할머니에게 감사를 전했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 글을 꼭 쓰고 싶었다.
3일이란 시간동안 엄청난 감정들이 오갔고 그 감정들을 정리하고 싶었다. 이렇게 글 속에 내 감정들을 하나하나 저장하고 다시 새로운 감정들을 발견하고 맞이할 준비를 하고 싶었다.
어린시절부터 성인이 될때까지 유일하게 왕래가 잦았던, 내가 유일하게 애착 형성을 할 수 있었던 조부모가 우리 할머니였다. 엄마가 아픈 이후에도 고래고래 서로 소리를 지르면서 싸워대는걸 보면서 유전은 무섭다며 우리 엄마 성격이 할머니를 쏙 빼닮은 것 같다고 혼자 웃었었던 기억이 난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김장도 하시고 마늘도 심으시고 하고 싶은거 다 하시다간 우리 할머니. 일찍 남편을 떠나보내고 혼자서 셋을 키우시면서 참 고생도 많이 하셨다는 우리 할머니.
외숙모가 그러셨다.
'우리 어머니, 아버님 그렇게 보고싶어하셨는데 이제 드디어 만나시겠네. 만나셨을까?'
'네. 벌써 만나셨을걸요? 왜 이제 왔냐고 외할아버지가 엄청 기다렸다고 하실거 같아요.'
우리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할머니의 집을 떠나며 엉엉 울던 사촌이 그런 말을 했다.
'태어나서 가족이 많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처음했네?' 이 나이 먹고 이제서야 느낀다는 시니컬한 농담을 포함했지만 3일 내내 우리 모두 느꼈다.
코로나로 인해서 오랜 기간 보지 못했던 가족들, 이렇게 할머니 덕분에 다같이 모여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는 연말을 보낼 수 있었다. 할머니가 우리에게 주신 또 하나의 선물이 아니었을까.
상실을 마주하는 건 슬프지만 그 상실감 앞에서 어떠한 것들을 발견하느냐에 따라 희극이 되기도 비극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할머니를 떠나 보낸 것은 내가 잊고 있었던 많은 소중함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할머니, 이제 고생하지 마시고 맛있는 것도 많이 드시고 할아버지랑 오래오래 행복한 시간만 보내세요.
우리 엄마 낳아주셔서, 우리 많이 사랑해주셔서 감사해요.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