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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온 Jul 27. 2021

새로운 세계를 들이는 일


가족이라는 존재 자체가 큰 버팀목이었는지 몰랐다. 혼자서도 잘 살아남는 사람이고 독립적인 개체라고 생각했다. 폭풍이 가족 안으로 들어오자 가장 먼저 튕겨나간건 나였다. 그렇게 튕겨나가 도착한 곳은 가족이 아닌 연인과의 관계 속이었다. 그 관계 속의 사랑을 무작정 쫓아갔다.

쫓아가는 길이 불구덩이인지 진흙탕인지 그런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 길에 열중하는 것만으로도 당장 내가 처한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불이 뜨겁다고, 불이 반짝인다고 사랑했고 물이 시원하다고, 물결이 찬란하게 비친다며 사랑했다.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허울 좋은 이유로 관계 속에 존재하는 나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불구덩이에 뛰어들면 그 불을 온몸으로 받아들였고 물웅덩이에서는 깊이를 알지도 못하는 그 심해에서 그저 발장구만 쳐댔다. 다시 그 모든 과정을 빠져나온 후의 나는 어떨지 생각 조차 하지 않았다.

불이 꺼지고 물이 말라버리고 나니 처음 그 곳에 들어갔던 내가 아니었다. 겨우 형체만 남아 벌벌 떨며 또다시 불이나 물이 나를 삼켜버릴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눈 앞의 고통을 잊어버리려고 선택한 것들이 또다른 고통이 되어 나에게 찾아왔다.


무서워졌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그것을 유지하고 끊어내는 그 모든 과정들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겨우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면서 아름답다고 박수를 치고 물구덩이에 살짝 손을 담궈볼까 고민을 하는 정도로 만족했다. 마음에 둔 상대가 어떤 생각을 하든, 그저 좋아하는 그 자체로 행복했고 만족스러울 뿐이었다.

되돌아보면 그저 한없이 이기적이었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일상 속에 소소하지만 길게 이어지지 않는 즐거움들을 쌓아가며 시간을 보냈다. 누가 나를 좋아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 그것만으로도 그저 살아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으니까. 스스로에게 상처받고 스스로에게 기뻐했고 스스로에게 힘들어하는 시간들이 흘렀다.



사랑하는 이의 살고 죽음을 결정해야하는 건가 말도 안되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기도 했다. 무력함과 무상함을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마음 속에 숨어있는 욕심으로 인해 우는 날이 늘어갔고 결국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떠나기 직전에도 온갖 불안함에 안정제를 털어넣으면서도 떠나지 않으면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막상 떠나왔음에도  천국같은 곳에서 지내는 것이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악몽을 연달아 꾸고 아프기 시작했다. 차라리 돌아갈까. 결국  마음이 문제였던걸까 자책하기도 했다.


새로운 곳에서의 삶에 조금씩 적응했고 예전의 내 모습을 찾아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고 작은 실수에도 크게 자책하지 않고 '그럴 수 있지' 모든 것을 너그럽게 넘길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진 나로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하고 싶은 것도 생겨났다. 행복하다는 말을 숨 쉬는 만큼 했다. 이게 나지. 이게 나였어. 나를 다시 찾은 기분이었다. 더할나위 없이 행복했지만 그 시간에는 한계가 있었다. 돌아갈 날이 코 앞으로 다가오자 나는 다시 불안에 시달렸다. 이제는 멜라토닌까지 먹어야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었다. 그럼에도 돌아가야한다고 마음 먹었다. 나에게 처한 문제는 도망칠수도 없고 피할수도 없으니까.


한국으로 돌아온 후 예상대로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4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우울이 1도 없냐'라는 정신과 의사의 웃음 섞인 말을 들었던 내가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하자 '내가 불안하구나'하고 스스로 알아차리는 경지에 이르렀다. 때로는 호흡이 가빠지면 '과호흡이 올지도 모르니 조금 천천히 숨을 쉬어야겠다'고 나를 달랬다. 그 모든 과정에도 나는 혼자이길 자청했다. 혼자가 편하니까. 혹여나 내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고 의지를 해버렸다가 그 누군가가 나를 떠나버리면 나는 두번 버려지는 기분이 들테니까. 더이상의 그 어떤 고통과 시련은 절대로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 정도로 만족하던 때에 누군가 내가 정해놓은 선을 넘어버린다 싶으면 아주 높은 벽을 쌓아버리고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변해버린다. 대부분 그런 시점이 오면 정중하게 내 마음을 표현한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부분을 존중받고 싶은지. 그런데 그 아무말도 없이 잠시 떠나있고 싶었던 시간들이 찾아왔다.


엄마를 보고 돌아오는 길. 왜 엄마는 내 앞에서만 우는건지 이해할 수 없다며 핀잔을 늘어두고 기차에 앉아 흐린 하늘만 바라보는데 내 마음은 아무런 준비가 안되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그 두드림이 어떤 두드림인지도 모른채 그 순간이 무서웠다. 예의를 지킬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어떤 방향으로든 그 때의 나의 무례함을 사과하고 관계를 잘 마무리 해야겠다고 느껴 조심스레 몇자를 적어냈다. 사실 나를 좋아해서 그런건지도 단순히 술에 취해 그런건지도 몰랐지만 적어도 그 짧은 인연에서 느낀 따뜻함에 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이어진 연락은 무슨 잘못이 있었더라도 그건 다 본인이 잘못한 것이라는 따뜻한 말에 늘 자책만 하던 나에게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늘 관계가 깨질까 전전긍긍하고 조심하던 사람은 나였는데 나에게 조심하겠다고 말을 했다.


술을 잔뜩 먹은 다음 날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몰라 다시 또 쿵쾅거리는 마음을 붙잡은 날에도 전화기 건너로 넘어오는 숨소리가 몇알의 안정제보다 더 효과적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존재로서 위로 받을 수 있는 연이 있다는 자체로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글을 쓰다가 우연히 작년에 내가  글을 봤다. 코로나가 심해져 엄마 생일에 엄마를 보지 못하고 서울에 올라와야 했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이사간 뒤의 삶은 살만하냐며 나에게 밥은  챙겨먹었냐고 도리어 걱정을 했다. 작년 오늘도 울었는데 올해 오늘도 울어버렸다.

이제는 엄마의 목소리도 들을 수가 없는데 갑자기 또 내 삶을 살아간다는게 버겁게 느껴졌다. 과연 내가 새로운 관계 속에서 온전한 나로 잘 버텨낼 수 있을까. 나의 수많은 감정들 사이에서 혼자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그 모습을 가까운 옆에서 바라보는 누군가가 나를 버거워하고 떠나버리지 않을까.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이고 내어주는 일들이 아직 나에게는 성급한 일은 아니었나 불안해지고 생각이 많아진다.


하루에 먹을 수 있는 최대 용량의 약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알씩 세어봤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아홉알을 먹고 잠에 들면 내일은 조금 더 변화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생길까. 여전히 어렵다. 그래도 도망치지 말아야겠지. 나를 위해서. 내가 나로 살아내기 위해서 어떻게든 어떤 방향으로든 노력해보아야하는거겠지.


글을 쓰던 와중에 온 전화가 왔다. 마음을 가다듬고 밝은 나로 돌아갈 시간이 필요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언젠가는 그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더라도 마음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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