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힘
이야기 하나.
시시콜콜한 농담이나 처음 만난 다소 어색한 사이에서 아이스 브레이킹이 필요한 시점이 아니라면 왠만하면 듣는 쪽이 되려고 노력한다. 일단 한번 말문을 열면 멈출 수 없는 박찬호급의 헤비토커이기도 하고 근황 토크가 아닌 이상 내 이야기들은 레파토리가 대부분 비슷하기 때문에 스스로 좀 지겹기도 하고 말이다.
본인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는 친구 하나가 갑자기 그런말을 했다. "누나는 그런 힘이 있는 것 같아. 사람의 말을 이끌어 내는 힘."
그 친구도 나도 어떤 연유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진 모르겠다. 어쩌면 편견 없이 세상을 바라보려고 매번 노력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워낙 드라마틱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어렸을 때부터 티비로 접했기에 친구들이 가져오는 조금은 놀랄만한 이야기들도 전혀 놀랍게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이상형으로 삼는, 스스로 되고자 하는 모습인 '다양성에 대한 인정'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 늘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간에 친구가 해준 그 말은 내 인생에서 오래 기억될 나에 대한 말이 될 것 같았다.
이야기 둘.
엄마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나는 아무도 나를 공감해줄 수 없다고 생각해 힘들다는 말을 잘 하지 않았다. 내 주변에서 엄마와 같은 병을 앓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희귀병에 걸린 가족의 투병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말해봤자 서로 마음만 무겁기에 굳이 나의 힘듦을 토로하지 않았다. 때로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원망어린 마음이 들 때 쯤엔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내가 먼저 겪었기에 내가 누군가의 위로가 될 수도 있겠다'
내가 의사가 아니기에 병을 고쳐줄 수는 없지만 내가 가진 언어적인 능력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보듬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내 주변에 나와 같은 마음의 아픔을 겪는 이들은 없길 바랬지만 말이다.
친구 하나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의 어머니 역시 우리 엄마와 같은 병을 진단 받았단다. 우리 엄마는 서울의 모든 대학병원을 다 가고 난 이후에야 2~3년의 전조 과정을 지나치고 그 병임을 우리는 확신했다. 하지만 친구의 어머니는 몇 주 사이에 그 병을 진단 받았다고 하니 나는 이곳 저곳 더 병원을 찾아가보라며 엄마의 주치의 선생님을 추천했다.
친구는 곧이어 결혼을 했고 식장에서 친구의 어머니를 보았다. 고운 한복 아래에 하얀 신발. 하얀 병원 신발. 걸어 다닐 일이 없어 정말 순백의 고운 그 하얀 신발을 어머님은 한복 아래 신고 계셨다. 그 날 그 친구는 유독 많이 울었다. 연유를 모르는 친구들은 그저 감정이 복받쳐 운다 정도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엄마의 병을 처음 맞이했을 때, 그것을 인정하기까지는 매순간 나약해지는 엄마를 바라보면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는 것. 그치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는 슬프지 않았다. 어머니가 저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웃으면서 말씀도 잘 하시면서 자식의 결혼을 축하할 수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도리어 부러워지기까지 했다.
당장의 슬픔이 처음 와닿은 지금이야 잘 모른다. 나도 그랬고 말이다. 하지만 지나고보면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예쁘게 웃으며 함께 사진도 찍고 결혼식의 모든 과정을 참석할 수 있다는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분명 알게 될 것이다. 살면서 아쉬운 것도 후회스러운 것도 없지만 유독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내가 결혼을 할지는 모르겠으나 엄마는 나의 결혼식에 오시기 힘들 거라는 것. 그러기에 친구의 어머니를 보면서 참 감사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몇일 고민하다 친구에게 먼저 연락을 했다.
[친구야 나는 지난 시간동안 나에게 찾아오는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거부하려고 하면서 너무 힘든 감정들을 겪었어. 우리언니는 그 순간 순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서 가족과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것에만 집중했는데 난 슬프고 속상한 것에만 집중이 되더라구. 나는 너가 나처럼 힘들고 슬픈 것에 집중해서 눈 앞의 소중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가장 젊고 예쁜 시간인 지금이 주어짐에 그저 감사할수 있기를.]
조금은 주제 넘는 발언이지 않을까 싶어 메세지 앞뒤로 구구절절 사과의 말을 덧붙였다. 그 뒤로 늦은 밤 돌아온 친구의 답장에는 너무 고맙다는 말이 연신 적혀있었다. 텍스트로 적힌 나의 마음이 친구에게 와 닿은 것 같아 감사했다.
이야기를 마치며.
늘 말을 아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다정한 말들로 나와 함께하는 모든 이들에게 솜사탕 같은 달콤하고 편안한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러기에 타인의 일에 지나치게 관여하거나 마음 쏟지도 않으려고 했다. 나와 견해가 달라 혹여나 불편한 상황이 생길까 두려웠기 때문에 타인의 일은 그저 경청하며 타인의 일로서 존중했다.
두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때로는 내가 겪은 일들을 말하는 것이, 무겁고 어려운 이야기일지라도 내 진심을 담은 마음을 전하는 것이 상대에게는 큰 위로가 될 수도 있겠구나 다시금 깨달았다. 진심은 닿는다는 말을 그닥 좋게 듣지 않았다. 어떠한 진심이라도 상대가 들을 준비가 되어 있거나 나의 진심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나 여유가 없다면 소용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순수한, 상대를 위한 진심은 통할 수 있겠구나 싶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