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먹여살리는 기술
더 이상 생선을 먹지 않지만 생선구이를 볼 때마다 아이 아빠가 떠오른다.
"난 비린 거 안 먹어."
라고 했다. 채식하며 안 먹는 것이 많으니 나도 편식에 대해 할 말이 없지만,
그의 편식은 단순한 취향이라기보다 일종의 '자만심'처럼 느껴졌다.
그의 입에서 '그런 거'라며 통칭되는 것은 음식뿐이 아니었는데,
누군가 야구 봤냐 물었을 때, '나는 그런 거 안 봐, 메이저리그 보지.' 했던 것과 같이
어떤 종류의 음식들을 질 낮은 것이라 싸잡아 뭉개며
자신은 그것들에서 얼마나 멀고 고귀한가 하며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러니까 그가 편식하는 태도를 볼 때 나는 뱃속이 좀 니글거렸다.
그런 배경으로 그는 생선 중에도 참치회 같은 숙성회, 옥돔구이, 갈치구이 같은
비교적 값이 나가는 것들만 자신의 입으로 허락했는데,
그와 처음 생선구이를 먹었을 때 받은 작은 충격이,
지금도 생선구이를 볼 때마다 떠오른다.
한 번도 스스로 생선을 발라먹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말했던 모습 말이다.
어릴 때 생선구이를 맛있게 먹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갈치와 고등어를 주로 구워줬었다.
엄마가 발라주기도 했던 것 같지만,
나는 내 스스로 생선 살을 바르며 느낀 성취감을 아직도 기억한다.
젓가락으로 세심하게 생선의 가장자리 쪽 살을 꼬집듯 잡고 바깥쪽으로 당겨내며
양 바깥쪽의 지느러미와 가시를 제거했고, 머리를 떼어냈다.
척추만 남은 생선의 앞뒷면 살을 조심히 들어 올리거나
척추선을 따라 좌우로 갈라 살만 획득하던 그 성취감 말이다.
갈치는 폭이 대략 일정하고 길어서 살 바르기가 가장 수월했고
그다음은 고등어였다.
그때는 부릅뜬 그 생선의 눈도 별로 신경쓰지 않고
생선 살 바르는 작업에 초집중을 했었다.
전 남편도 나도 각자 자부심을 갖지만,
감히 내 자부심이 그의 것보다 쓸만하다고 믿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사람은 스스로를 먹여살릴 줄 알아야 한다고 믿는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겠지.
전 남편은 공부하고 번듯한 직장에서 월급을 잘 받는 것
(또는 그에 상응하는 안정적 수익을 버는 것)이 그 방법이라 믿고,
나는 스스로 먹고 싸고 자고 하며 일어나는 필요한 일들을 처리하는 스킬을 갖추는 것,
다름 아닌 요리할 줄 알고, 치울 줄 알고, 빨래할 줄 알고,
제 새끼를 제대로 키울 줄 아는 것이 그 방법이라 믿는다.
그에게는 두 번째 기술이 없고,
나에게는 첫 번째 기술이 약하다.
책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정아은'에서는 말해준다.
산업화 시대를 거치며 남자가 일터에 나가 최대의 생산력을 낼 수 있도록
여자는 집에서 남자가 생산력을 재충전할 수 있도록 보조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고 했다.
그러니까, 남자가 재충전을 하기 위해서도 비용이 필요한 것이 산업화이고 자본주의인데
돈 들이지 않고도 재충전을 할 수 있는 구조, '전업주부가 있는 가정'이 그 역할을 하며
남자의 생산성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자본주의적 가치로는 무시되면서도 그 구조의 양적 성장을
받쳐올리는 것에 필수적인 가사노동의 가치가 무시되는 일, 그것을 전담하는 전업주부가
일할 만큼 하고도 '노는 사람'이라 스스로 칭하며 느끼는 허무함의 배경을 설명한다.
사회는 '첫 번째 기술; 돈을 버는 일'만을 강조한다.
그러니까 내 딸에게는 그것을 가르치는 일에는 조금 힘을 빼고,
(나도 아직 잘 못하니까)
두 번째 기술을 강조하는 역할에 더 충실하려고 한다.
모든 것이 귀찮은 '자기중심적' 시기를 보내고 있는 아이에게 이것을 전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제발 니 방이라도 청소해.', '빨래는 방구석에 처박아두지 말고 빨래통에 좀 넣을래?',
'젖은 수건은 제발 침대에 올려놓지 마.', '오늘은 너가 설거지할래?'
같은 말을 한 번씩 할 때마다 겪어야 하는
아이의 짜증스러운 얼굴, 내 말을 다 마치기도 말이 잘리는 등의 치사함을 생각하면
내가 나가서 돈을 더 벌고 말지 싶기는 하다.
지금은 생선의 눈이 신경쓰이게 됐지만, 가끔 딸을 위해 생선을 굽는다.
밥좀 잘 먹었으면 하는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 생선 살쯤은 스스로 발라먹을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