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을 키우는 마음
서아 엄마, 나 이것 좀 줘요!
하원 도우미 선생님께서 이렇게 당당하게 무언가를 요구하신 건 처음이었다. 집에 선물 들어온 과일이며 식재료를 내가 먼저 말씀드려 나눠 드린 적은 많았지만 나눠 드려야겠다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걸 달라하셨다. 그건 바로 우리 집에 있던 '필레아 페페'라는 아담하고 동글동글한 잎이 매력 포인트인 식물이었다. 한 화분 안에서 어미가 씨를 뿌려 두 덩이의 새끼 필레아 페페가 새 싹을 내고 있었다.
아직은 좀 이른 것 같고, 뿌리를 내리면 화분에 옮겨 드리겠다 했더니 선생님께서는 "우리 서아 생각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키워야겠네~"라며 기뻐하셨다.
생각해보니 우리 집에 있는 필레아도 내가 많이 좋아하는 회사 동료에게 선물 받은 것이었다. 번식을 비교적 잘하는 식물이라 그것도 여러 번 분양받았다. 내가 물방울 모양의 페페를 보고 예쁘다 했던 것을 잊지 않고 있다가 어느 날 예쁜 화분에 옮겨줘 내심 감동했던 기억이다.
식물을 키운 지 얼마 되지 않기도 했고 스스로도 키우는 데 아직 서툴다 생각해 우리 집의 무언가를 분양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그것도 그러니와 식물이란 것은 그렇다. 선물 받을 상대가 식물 키우기에 취미가 있다는 걸 알지 않는 이상 선물하기가 좀 주저된다. 괜히 짐이 될까 걱정되는 마음이 앞선다. 게다가 내가 몇 달을 물 주고 닦아주고, 행여나 잎이 떨어졌을까 색이 바랬을까 노심초사해가며 마음을 들여 키운 식물이 낳은 새끼를 덜컥 건넸다가 '곤란한' 취급을 받는 건 싫다. 하원 도우미 선생님의 취미를 몰랐던 나는 선물로 드려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내가 집에 없는 시간 동안 나의 딸과 시간을 보내는 선생님께서는 몇 주를 지켜보다 이야기한다며 환한 미소를 보이셨다.
서아를 보는 마음으로 잘 키우겠다는 말씀은 그냥 하신 말씀이셨을까. 그 말씀에 담으신 마음이 얼마큼의 크기였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집에서는 서아를 키우시고, 서아가 없는 본인의 집에서는 이 식물을 키워보시겠단 말씀은 꽤나 감사한 마음이 들게 했다.
식물을 키워본 사람은 알 것이다. 식물을 키우듯 관심을 준다는 게 얼마나 까다로운 일인지.
너무 과한 관심을 줘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관심을 아예 안 줘서도 안 된다.
겉만 봐서는 물이 필요한 지 알 수가 없고 꼭 흙을 손으로 들쑤셔 만져봐야만 한다. 일주일에 한 번, 이주일에 한 번 물을 주면 되려나 하고 '물 주는 주기'를 설정해봤었지만 늘 실패했었다. 수치로 정하는 '주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적당한 관심'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 식물이 처한 환경(우리 집)의 습도와 온도 바람 양에 따라 흙이 마르는 정도를 파악해서 딱 그에 맞는 때에 물을 줘야만 했다.
사실 아직도 너무 어렵고 귀찮다. 잘 못 하겠어서 자주 생각하려 노력할 뿐이다. 생각이 날 때 흙을 만져보고 이 때다 싶으면 물을 준다. 그 정도로도 잘 자라 줌에 감사할 따름이다.
많은 관심을 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 때쯤에 어느 날 눈길을 주면 새순이 자라 있다. '뾰로롱'하고 언제 나타났는지도 모르게. 분명 그저께 밤에 봤을 때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던 것 같은데 가지를 치고 잎이 자라고 방향을 틀고 새끼를 퍼뜨린 걸 보면 감동 그 자체이다. 정말로.
그렇게 해서 새끼를 친 나의 필레아가 누군가에게 간다니.
그런데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정말 그 정도의 마음으로 우리 딸을 보고 계셨을 테다. 나의 자식도, 손주도 아닌 생판 처음 본 젊은이들의 딸에게 쏟는 관심은 그 정도가 딱 적당하지 않을까. 너무 과했다간 언젠가 다가올 이별에 상처받기 일쑤일 테고 관심을 안 주면 아이에게 정이 안 들어 선생님의 '출근길'이 괴로워졌을 테니. 언제 떠나도 상처받지 않을 만큼의 관심과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 식물 키우는 마음이라면, 딱 그 정도의 마음으로 '하원 도우미'라는 일을 해내고 계셨을 테다.
그래서일까, 우리 딸을 키우는 마음으로 키워보시겠단 말이 정말 진심처럼 느껴졌다.
선생님께 드릴 생각으로 더 정성스레 키웠다. 새끼를 두 뿌리나 내려 원래 화분이 좁을까 나는 어미가 걱정됐었는데, 선생님께 드린다고 마음먹고 나니 어쩐지 새끼에게 화분이 좁은 것 같아 미안해졌다. 독립해도 될 정도로 클 때까지 꾹 참고 기다렸다가 집에 있는 작은 소주잔으로 옮겨주었다. 물속에서 실컷 뿌리를 내릴 수 있게.
소주잔 속에서 뿌리를 어느 정도 키운 필레아를 작은 토분에 옮겨주었다.
내 새끼를 맡기는 심정으로 선생님께 화분을 드렸다. 딸아이를 만난 뒤로 웃을 일이 많아져 집에 가면 남편 분에게 우리 딸아이 이야기밖에 안 한다는 선생님께, 우리 딸을 떠올릴 작은 기쁨이 되었으면. 서아를 바라보시는 애정만큼이면 나의 작은 필레아도 무럭무럭 자라지 않을까. 우리 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집에서는 우리 딸을, 선생님의 댁에서는 필레아를 우리 딸처럼 키워보시겠다던 선생님과는 사실 이번 달을 끝으로 이별하게 되었다. 딸아이가 회사 어린이집에 가는 행운을 얻음으로써 태어나 두 번째로 이별이란 걸 겪게 됐다. 할머니와 이별한 이후, 너무 좋은 어른을 만나 큰 다행으로 여겨졌는데 또 한 번 이별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우리 가족이 아니니 정말 조만간이 선생님과의 끝일 거란 걸 경험적으로 안다. 선생님께 간간히 드리는 연락이 선생님께 귀찮은 연락이 될까 채팅창 화면을 켜놓고 고민하는 날이 언젠가는 오겠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간간히 딸아이의 소식을 전하고, 우리 집을 떠난 식물의 소식도 전해달라고 말씀드려봐야지.
"잘 부탁드립니다. 잘 키워 주세요. 또 다른 기쁨으로 간직해 주세요. 감사했습니다."라는 말을 부끄러워 말고 꼭 전해야겠다. 내가 전한 별 것 아닌 그 말이 선생님의 여생엔 큰 반향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 체온을 내어주고, 감사의 말을 전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멋진 어른이 돼보자던 올해의 목표를 잊지 말고 행동에 옮겨야지.
다시 한번,
"잘 키워 주세요 선생님! 우리 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