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니베리 Dec 25. 2023

그 남자의 다리

그 남자의 사정


 ‘예약하신 도서가 도착했으니 수령해 가시기 바랍니다.’ 도서관에서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인터넷으로 기온을 확인해 보니 영하 14도. 체감온도는 영하 20도를 훌쩍 밑돌 것이라는 기사가 가득했다. 옷을 겹겹이 껴입고 마스크, 모자, 장갑으로 몸을 꽁꽁 감싼 채 문밖을 나섰다. 하지만 모자와 마스크 사이로 드러난 좁은 틈새로 스치고 지나가는 찬바람에도 살점이 에이는 듯 고통스러웠다.

 

 도서관 건너편 횡단보도 앞에서 녹색 신호를 기다리던 중, 짧은 바지를 입어 종아리를 훤히 드러낸 채 서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종아리는 전체적으로 붉으면서도 희노란 색이 감도는 게 마치 꽁꽁 언 ‘스트로베리 치즈 아이스크림’ 같아 보였다. 저 남자는 어쩌자고 이렇게 추운 날 저런 차림새로 나왔을까. 그를 재빠르게 훑어보았다. 뒤통수를 중심으로 탈모가 진행 중이었으나, 얼굴과 차림새로 보아 30대 초중반쯤 되어 보였다. 흰 얼굴에 끼고 있는 검은 안경테는 세련된 크롭 검정 점퍼와 잘 어울렸고, 신고 있는 고가의 흰색 운동화는 눈부실 정도로 깨끗했다. 하지만 그가 입고 있는 후줄근한 7부 추리닝 바지는 그의 전체적인 스타일과는 동떨어져 보였다. 내 시선이 바지로 향하자 남자가 갑자기 바지를 무릎까지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추위에 다리를 비비 꼬면서도 말이다. 아니, 바지를 조금이라도 더 내릴 것이지 왜 저러는 걸까? 안쓰러운 마음 반, 의아한 마음 반으로 지켜보다가 이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때마침 신호등이 바뀌어서 길을 건너다가 뒤를 힐끗 쳐다보니 남자는 길을 건너지 않고 눈을 비비며 서 있었다. 추운데 계속 저기에 있으려나?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하고 나왔는데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남자가 입고 있던 바지 밑단에 수 놓인 분홍색 토끼와 하트 무늬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지는 여자 옷임이 틀림없다! 그때부터 내 머릿속에 남자의 이야기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남자에는 서너 살 먹은 아이의 아빠일 것이다. 아내는 남편만 보면 육아와 살림이 힘들다고 하소연했으나, 탈모가 올 정도로 직장 일로 스트레스가 심한 남자는 아내의 말을 들어줄 심적 여유가 없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랬다. 휴일에는 늦잠도 자며 한 주간 쌓인 피로를 좀 풀고 싶은데 아내가 이른 아침부터 아이를 돌보라고 폭풍 잔소리를 하며 깨웠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나 이번 주 내내 야근한 거 몰라? 이놈의 집구석에서는 정말이지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어. 제발 숨 좀 쉬자!"

 남편의 고함을 들은 아내가 멈칫하더니 잠시 후 더 크게 고함쳤다.

 "당신 지금 말 다 했어? 뭐, 숨을 못 쉰다고? 그게 지금 나한테 할 말이야? 24시간 꼼짝없이 회사일, 가사, 육아에 매여 있는 나야말로 정말 숨 쉴 틈이 없어서 답답하고 미쳐버리겠다고!"     

 엄마 아빠의 소란에 놀란 아이는 목청이 떠나가라 울어댔다. 남자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바지를 주섬주섬 주워 입고 걸려있는 점퍼를 낚아채어 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에 타서야 아내의 바지를 입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지갑도, 스마트폰도 안 가지고 나왔다. 망했다! 하지만, 지금 집에 다시 들어갔다가는 더 큰 싸움을 벌어질 게 틀림없다. 그래, 운동이라도 하자. 달리면 몸이 데워지겠지. 하지만, 이게 웬걸. 달릴수록 다리가 더 얼어붙는 것 같았다. 추위로 인해 통증까지 느껴지던 다리에 감각이 사라졌다. 다리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멈춰 섰다. 종아리 색깔이 이상한 게 동상이라도 걸린 건 아닌지 걱정됐다. 그때 내 바지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아줌마의 시선이 느껴졌다. 마누라 바지인 걸 눈치챘을까? 바지를 접어 올려서 망할 놈의 토끼 그림이라도 가려야지. 그나저나 아내는 애를 낳은 게 언제인데 배는 왜 여전히 남산만 한 건지, 허리춤에서 바지가 줄줄 내려오는 것도 짜증스러웠다. 그때, 나를 지켜보던 아줌마와 눈이 마주쳤다. 눈빛 가득 안쓰러움이 담겨있었다. 갑자기 가슴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올라오며 눈물이 핑 돌았다. 지금쯤 아내는 마음이 풀렸을까, 아니면 아이 데리고 친정으로 가버렸을까? 후자가 낫겠다. 부디 집에 들어가면 고요한 정적이 흐르길. 몸을 휘감고 있는 추위를 뜨거운 물로 싹 씻어낸 뒤 뜨끈뜨끈한 라면을 먹으면서 TV를 보면 지금의 고난이 싹 잊힐 것 같다. 남자는 이러한 생각으로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집을 향해 발걸음을 돌이켰다.      


 이 남자의 사정을 떠올리며 걷다 보니 금세 집 앞에 도착했다. 이 남자의 사정에 대해 어떻게 알았냐고?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나. 후훗.






이미지 출처: Freepik

매거진의 이전글 슬픈 썸, 더 슬픈 사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