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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베리 Jun 20. 2023

슬픈 썸, 더 슬픈 사랑

 아주 오래전, 찬란하게 빛나는 작은 섬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다.


 내가 머물던 숙소는 이름만 리조트였을 뿐, 허름한 게스트하우스 같은 곳이었다. 분홍색 페인트로 칠한 방에는 낡은 침대와 옷장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천장에 위태롭게 매달린 실링팬은 돌아갈 때마다 삐그덕 삐그덕 소리를 내며 더운 바람과 먼지를 일으켰다. 숙소 밖 왼 편으로는 비쩍 마른 십 여 그루의 나무가 띄엄띄엄 서있는 수풀이 있었고, 숙소 바로 앞에는 바다와 강이 만나는 라군이 잔잔하게 흘렀다. 오래되고 볼품없는 시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자연환경로 인해 이곳을 리조트라고 우긴다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나름 명색이 리조트인지라 숙소 곁에는 조그마한 식당도 있었는데, 쾌적하지도 청결하지도 않았으나 저녁이 되면 NGO에서 일하는 이들이 허기와 외로움을 달래고자 모여들었다. 미국인 J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스위스에서 온 꺽다리 청년, 세련된 현지인 여성과 나란히 식당으로 들어왔다. 스위스 청년과 안면이 있었던 나는 그들과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고 통성명했다.


 어느 날부터 J가 동료들과 식사를 마친 후에도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리조트에 홀로 남기 시작했다. 그는 내 고정석인 라군 가 벤치로 다가와 한쪽 끝에 조심스레 걸터앉은 채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자신이 속한 기관이 한국과 깊은 관련이 있다며 시작된 이야기는 날이 수록 개인적인 이야기로 흘러갔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방은 열기로 가득해서 찜질방보다도 뜨거웠기에 선선한 바람이 부는 밤까지 들어갈 수 없었고, 야외에는 벤치가 한 개뿐이라 J가 귀찮아도 마땅히 피할 곳이 없었다. 그의 말을 듣는 게 지루하다 싶으면 묵직한 카메라를 들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 사진을 찍었다. 그가 카메라에 관심을 보이길래 가끔씩 카메라를 건네주고 조작해 보도록 허락하기도 했다.


 석양으로 물들어 자몽 알갱이처럼 반짝이는 라군은 해가 넘어감과 동시에 순식간에 짙은 어둠으로 덮였다. J와 나란히 앉아 새까만 수면 위로 은빛 물고기 떼가 튀어 오르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각자 떠나온 곳은 다르지만, 머나먼 이국 땅에서 고된 하루를 마치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현실적이고 신비로운 광경을 공유 것은, 내가 잊을 수도 있는 추억을 금고에 저장하는 것 같은 든든을 주었다.


 언젠가부터 J는 나의 동선에 관해서도 파악하고 있었다. 아침에 들리는 빵집도, 그곳에서 어떤 빵을 사 먹는지도, 그날 방문했던 곳도, 만난 사람들도. 놀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이곳이 워낙 좁은 동네라 알게 되었을 뿐이라고 웃어넘겼다. J는 깃발을 펄럭이는 차를 몰고 먼지를 자욱이 날리면서 지나가다가 나를 발견하면 차를 세우고 내려 크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나 역시 뜻밖의 장소에서 J를 만나면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가 다가와 말을 걸려고 하면 부끄럽기도 하고 조금은 겁도 나서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동료들을 먼저 돌려보낸 후 벤치에 나타난 J는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연애관, 결혼관, 배우자와 함께할 미래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의 이야기가 뜻하는 바를 알 수 없을 때는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며 딴청을 피우기도 했다. 그러면 J는 어눌한 발음으로 를 따라 한국어 노랫말은 읊조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J가 평상시와 다르게 격양된 어조로 빠르게 말했다.

 "나 며칠 내로 여길 떠나서 미국으로 돌아갈 거야. 너도 알다시피 이곳 상황이 많이 좋지 않아. 내가 들은 정보에 의하면 이제 곧 내전이 발발할 거야. 스위스 친구도 내일 오전에 철수한대. 너도 어서 여기를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아. 여기 정리하고 미국으로 와줄 수 있니? 나 말이야, 결혼해서 살려고 이층 집도 마련해 놨는데 너한테 보여주고 싶어. 엄마도 소개하고 싶고. 우리 엄마도 널 만나면 좋아하실 게 틀림없어."

내가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걸까?


 내전 발발에 대한 내용만큼이나 그의 이야기 전개에 놀란 나는 얼떨결에 입을 뗐다.

 "No!"

 J의 갈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가 한참 후 젖은 눈으로 이유를 물었다. 그의 얼굴을 보니 성심껏 답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올라왔다. 나는 심사숙고하여 처음으로 J에게 긴 문장으로 답했다.

"유 돈 노미, 유 돈 노우 미."

흡사 아름다운 노랫말 같기도 한 이 문장은 그가 지닌 문제의 핵심을 담고 있명문장이었다. J는 초점 없는 눈으로 라군을 바라보다가 비틀거리며 떠났다.


 그가 떠난 뒤, 나는 의문에 휩싸였다. 그는 대체 누구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일까? 자신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었던 말없는 동양 여자? 아마도 그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서 상상으로 영혼을 채워 넣은, 실존하나 허구인 여인과 사랑에 빠졌던 것 같다. 언제 발발할지 모르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문명의 이기로부터 멀어진 답답함으로 인해 제정신으로 살기 힘들던 그때, 청춘이라면 누구라도 겪을 법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가끔 TV에서 석양 질 무렵 아름다운 강 풍경이 비치거나, J가 일했던 단체 후원 광고가 나올 때 그가 떠오른다. 그때마다 마음속에 반짝이는 물결이 고요히 일렁이는 걸 보면 벤치 옆자리에 앉아서 함께 라군을 바라보던 J의 존재는 내게도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얼큰하게  취한 남편에게 슬픈 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모처럼 내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하던 남편이 말했다.

 "이 이야기가 슬프다고? 내 이야기가 더 슬프지. 그녀의 잔소리에 시달리며 사는 내 슬픔이 더 크다고요...."

 아, '영어 울렁증'으로 인해 슬프게 끝난 썸 이야기에 '잔소리 울렁증'으로 인해 슬픈 사랑 이야기가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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