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된 휴가
주말 아침,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박물관에 갔다. 활기 대신 평온함이 집을 채웠다.
아버지의 응급실행 이후로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직장 때문에 낮잠을 잘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이런 내가 반나절이라도 편히 쉴 수 있도록 남편이 배려해 준 것이다. 그의 마음을 베개 삼아 침대에 누웠다. 오늘 하루는 여유롭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유영할 것이다.
그때, 전화벨 소리가 내 상상 속 냇물에 퐁당, 작은 돌멩이를 집어 던졌다. 전화를 건 주인공은 어머니, 김 여사셨다. 내 목소리는 아직도 잠결에 머물러 있었다.
"자는 거 깨웠구나? 미안. 근데, 나랑 같이 한의원 가지 않을래?”
미안하다는 말, 청유형 어미와는 달리 엄마의 목소리에는 강한 의지가 배 있었다. 엄마의 무릎 치료를 핑계 삼아 나를 병원에 데려가시려 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커튼에 걸러진 햇살을 두고, 거친 태양 아래로 나가기가 마뜩잖았다. 하지만, 이곳저곳 말썽을 부리는 몸을 살펴야겠다는 생각에 침대에서 내려왔다.
한의원 문을 나서면서도 집으로 돌아가서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할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엄마가 양산을 펼치시며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만두를 드시고 싶다시네. 우리, 시장 갈까?”
시장 만두는 내가 몇 주 전부터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거였다.
시장 입구는 사람들로 붐볐다. 시장으로 들어서기 직전, 문득 근처에 있는 횟집이 떠올랐다. 저번에 남편과 방문했을 때 음식 맛에 반해 다음에 부모님 모시고 오자고 했다.
"엄마, 저쪽에 물회 잘하는 집 있는데 드실래요? 엄마, 물회 좋아하시잖아요."
엄마가 걸음을 멈추고 머뭇거리셨다.
"만두 먹고 싶지 않아?"
"어휴, 더운데 만두보다는 시원한 게 좋지요."
엄마가 빙긋 웃으셨다. 목에 두른 얼음 스카프에 그려진 빨간 동백과 잘 어울리는 미소였다.
가게 쪽으로 걷다가 갑자기 엄마의 걸음이 느려졌다.
"너 아이 가져서 배가 잔뜩 불렀을 때 나한테 물회를 사줬잖아. 지금 생각해 보니 너는 당시 날것도 안 먹었는데..."
엄마의 말끝이 흐려졌다.
가끔 이날을 생각하곤 했다. 발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부푼 배를 안고 뒤뚱거리면서 엄마를 모시고 횟집으로 향했던 날.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길 때마다 손바닥조차 땀으로 젖었던 무더운 날이었다. 임신 기간 내내 입덧으로 고생한 나는 엄마와 나 사이에 차려진 음식 중 손이 가는 것이 하나 없었다. 엄마에게 음식을 모두 밀어드리며 엄마가 즐거이 드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흐뭇하던 그때의 감정은 시간이 지나며 딱딱하게 굳어 가슴 어딘가에 걸려있었다.
걸음을 멈췄다.
"그러게. 보통 임신한 딸한테 엄마가 맛있는 거 사주는 거 아닌가?"
말을 뱉으니, 가슴에 있던 덩어리도 덩달아 목구멍까지 따라 올라왔다.
엄마도 그 자리에 멈추어 서신 채 고개를 떨구셨다.
"그때...... 많이 어려웠어. 내가 전에 얼핏 말했던 일이 그 무렵이었거든. 그리고, 내가 생각이 짧았지."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발을 구르며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대화를 나눈 적 없는 듯이 횟집으로 들어가고 싶기도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바닥으로 눈을 떨궜다.
아스팔트 위에 죽어있는 매미 두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나무에서 떨어진 지 오래되었는지 이미 몸은 말라 뒤틀리고 있었다. 임신기간 내내 누워 지내던 딸을 보러, 엄마는 바닥에 그득한 매미를 피하며 걸어오셨겠지. 한여름 더위에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서.
엄마가 조심스레 오른쪽 무릎을 굽혔다가 펴셨다. 칠순을 훌쩍 넘긴 엄마를 언제까지고 더위 속에서 서 계시게 할 수는 없었다.
"얼른 가요. 이렇게 밖에 서 있다가는 둘 다 익어버리겠어요." 목소리 톤을 올려 말했다. 엄마가 내 얼굴을 슬쩍 바라보셨다.
다시 느릿느릿 걷기 시작했다.
"네가 어릴 적 했던 말 기억나니? 네게 잘못하면, 나중에 엄마에 관해서 나쁘게 써서 책 낼 거라고." 엄마가 내 팔을 쿡 찌르며 말씀하셨다.
"어휴,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 나쁘게 안 써. 그냥 있는 그대로만 쓸 거예요. 그리고 뭐, 책은 아무나 내나?" 비실비실 웃으며 엄마를 놀리면서, 안심시켰다. 어릴 적부터 나는 그저 착하기만 한 아이는 아니었다.
가게에 들어가서 물회를 주문하자, 하얀 그릇에 고운 고춧가루색 육수와 해산물이 담겨 나왔다. 엄마가 물회를 그릇에 수북이 담아 내게 전해주셨다. 엄마 먼저 드세요, 하며 엄마를 살펴보았다. 엄마의 볼이 붉게 상기되었다.
"실은 계속 이게 먹고 싶었거든. 근데, 생 걸 드시질 못하잖니. 치료받으시느라." 그윽한 눈으로 물회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진작 말씀하시지요, 바로 사드렸을 텐데."
"어떻게 혼자 먹니?" 이렇게 말씀하시더니 옆 테이블을 가득 채운 가족을 슬쩍 훔쳐보셨다. 엄마 또래의 어르신 부부와, 내 또래의 자녀들 그리고 손주들이 둘러앉아 음식을 한가득 펼쳐놓고 시끌벅적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일단 오늘은 맛있게 드세요. 다음에 아버지도 모시고 와서 연포탕 사드릴게요."
"오늘은 내가 살게. 다음에도. 그렇게 하고 싶어."
아버지께서 편찮으신 이후로 엄마도 제대로 드시는 걸 본 지 오래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내가 계란찜에만 손을 댔음에도, 엄마는 눈치채지 못하시고 큰 그릇에 가득 담긴 물회를 가뿐하게 드셨다.
밖으로 나와서 내가 장을 보는 동안 엄마는 만둣가게로 향하셨다. 엄마 손에 만두가 두 봉지 들려있었다.
"하나는 네 거야. 집에 가져가서 먹어. “
"왜요? 그냥 한 개만 사시지. 잔뜩 먹어 배부른데. “
만두가 담긴 봉투를 학창 시절 엄마가 싸주신 도시락 가방처럼 들고 살랑살랑 흔들며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내게 양산을 씌워주셨다.
"우린 머리가 커서 양산 속에 함께 못 들어가요." 깔깔대며 양산 그늘에서 벗어났다.
엄마는 양산을 높이 치켜드시며 작은 소녀처럼 나를 따라오셨다. 우린 그렇게 뜨거운 아스팔트 길에 그늘을 만들며 걸었다. 바닥에 뒹구는 매미를 피해 장난스레 발걸음을 맞추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