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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베리 Sep 25. 2023

21세기 전의 전쟁

당신의 명절, 안전한가요?


 대한민국에는 명절에 전 뒤집을 걸 생각하면 속도 같이 뒤집어지는 여자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도 한 명 있다.


 결혼 후 첫 명절. 미국에 계시는 시부모님을 대신하여 큰아버님 댁에 인사를 드리고 오라는 미션이 주어졌다. 새댁이던 나는 시어른들께 귀염받을 생각에 그저 신이 났다. 동도 트지 않은 이른 새벽부터 서둘러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친척 어르신들에게 나눠드릴 선물을 한 아름 안고 큰댁에 도착했다. 환대해 주실 거라는 예상과 달리 매우 짧고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는 옷 갈아입을 새도 없이 차디찬 바닥에 떠밀리듯 앉아 전을 부쳐야 했다.


 큰어머님께서는 내가 전 부치는 모습을 잠시 살펴보더니 주섬주섬 커다란 프라이팬과 버너 한 개씩을 더 꺼내 양팔로 전을 부질 수 있도록 세팅해 주었다. 두 개의 프라이팬 위에서 전이 다른 속도로 익어갔기에 화장실 갈 틈도 없었다. 전날, 직장에서 큰 행사를 치르느라 무리해서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앉아 있으니, 허리부위에 통증이 심하게 느껴졌다. 큰댁 형님께 조심스레 상황을 말했지만 '어쩔 수 없잖아'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랜 세월 홀로 대식구 치다꺼리를 하느라 지쳤기 때문일까. 형님에게는 새 식구 배려할 여력이 조금도 없는 듯했다.


 신랑은 나를 주방에 홀로 남겨둔 채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마당에 차려놓은 상에 둘러앉아 어른들과 술을 마시며 호탕하게 웃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시간이 흐르며 허리는 뒤틀리다 못해 끊어지는 것 같았다. 네 시간, 다섯 시간, 여섯 시간...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갈까를 수없이 생각했다. 하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물론이고 남편의 사랑도 깨질까 봐 겁이 났다. 이러한 어리석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몸을 비틀고 허리를 꼬아가며 정리까지 마치고 나니 늦은 밤이었다. 식사 자리에 나가보니 생선 가시, 갈빗대가 굴러다니는 상 구석에 차갑게 식은 밥 한 공기가 놓여있었다. 밥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신랑이 물을 말아줬다. 친척들은 새신랑의 자상함을 추켜세우며 손뼉을 쳤다. 기름진 음식에 사랑까지 가득한 풍요로운 한가위 밤이었다.


 다음 날 새벽. 행여 남자들이 깰까 봐 형님이 까치발로 다가와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형님과 함께 도둑질하러 들어온 사람들처럼 조용히 움직이며 아침 식사 준비를 했다. 허리뿐 아니라 아랫배에도 극심한 통증이 찾아왔다. 그 때문에 아침도,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사촌 아가씨들이라고 하는 이들이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우르르 몰려오니 밥상을 차리라고 했다. 어느 순간부터 속도 울렁거리고 통증도 심해져 집에 돌아올 때는 새우처럼 등이 굽어버렸다.


 그날 밤. 엄청난 복통과 함께 붉은 핏덩어리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였기 때문에 아이를 갖기 위해 산부인과에 다니고 있던 때였다.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한 나의 어리석음이 원망스러웠다. 가슴에 날카로운 유리 조각으로 베인 듯한 차가운 아픔이 느껴졌다. 가슴에서도, 눈에서도 선홍빛 피가 흘러내렸다.


 이튿날. 부서질 것같이 아픈 몸을 이끌고 친정에 인사드리러 갔다. 결혼 후 첫 명절을 지내고 온 딸의 퉁퉁 부은 얼굴에서 혈기도, 웃음도 사라진 것을 본 친정엄마가 말없이 흐느껴 울었다.




 몇 해가 흘렀다. 깁스해서 굽혀지지 않는 다리를 차에 구겨 넣고 몇 시간을 달려 시골에서 전을 부치고 온 적도 있었다. 생일과 겹친 명절날에는 내가 차린 아침상에 앉아 축하받기도 했다. 이토록 여럿이 축하를 해주니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이냐는 말씀도 들었다.


 내 일화를 들은 한 아이 엄마가 말했다. “언니, 저는 임신 8개월 때 다섯 시간 동안 전 부쳤잖아요. 무거운 몸으로 일하는 것도 서글픈데 어머님께서 집에 냄새 밴다고 베란다로 나가라는 거예요. 혼자 베란다에서 벽 보고 서서 부르스타 켜고 전 부쳤어요. 좁은 베란다에서 어찌나 힘들던지... 그날 애 나올 뻔했다니까요.” 이 친구, 조산하지 않고 건강한 아이를 낳은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 이야기를 듣던 20대 젊은 엄마가 말을 꺼냈다. “언니들, 저는 처음 시가에 인사드리러 들어서는데 시할머니께서 호통을 치시더라고요. 어디 여자가 대문으로 들어오느냐고요.” 우리 모두 기함했다. “그러면 어디로 들어가야 하는데?” “저희 시골에는 여자들이 따로 드나드는 쪽문이 있어요. 여자들은 그 문으로 다녀야 해요.”




 이제 곧 명절이다. 조만간 전국 방방곡곡에서 전을 비롯한 갖가지 음식 냄새가 진동할 것이다. 이 무렵이면 언론에서는 ‘차례란 차(茶)나 술을 올리면서 드리는 간단한 예(禮)를 뜻하는데, 이를 기제사상과 혼동해  (여자들을 동원하여) 거나하게 차려내어 명절의 참된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는 내용을 다루곤 한다. 하지만 괄호 속 이야기는 나같이 날이 서 있는 여성에게만 들릴 뿐이다. 이곳은 21세기 대한민국. 하지만 아직도 여자는 대문으로 드나들지 못할 수도 있고, 남성들 위해 전 뒤집다가 속 뒤집어져 죽을 수도 있는, 여성들에게 여전히 닫혀있고 위험천만한 세계이다.





이미지 출처: Freepik(작가 pikisuper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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