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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n 28. 2024

삶에서 삶으로

한반도 최초 통일왕조의 문무왕의 할아버지 가락국양왕덕양전  

결혼도 출산도 예전 같은 관점으로 보고 있지 않은 요즘 삶에서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에 대한 의미가 희석이 되고 있다. 마을공동체를 이루어가던 사회에서 점차로 가족단위로 분화되고 이제는 1인가구 위주로 구성이 되어가고 있다. 사람의 수명 관점으로 본다면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만 멀리까지 본다면 1인가구가 일반적인 삶의 기준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역사를 살펴보면서 피를 이어받으며 흔적을 남겼던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현대의 관점으로 해석하면 한반도에 통일왕조가 처음 들어선 것이 신라라고 말하겠지만 당시의 관점으로 본다면 고구려나 백제, 신라는 그냥 이 땅에서 패권을 가지려는 나라들이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였으니 어느 정도 소통은 되었겠지만 지금처럼 한글을 공통적으로 사용하지 않았기에 한계는 있었을 듯하다. 

문무왕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나서 최초로 왕으로 등극한 사람이었다. 태종무열왕의 명령으로 덕물도(德物島:덕적도)에 파견되어 뱃길로 온 소정방(蘇定方)을 맞이하고  즉위한 뒤 직접 종군하면서 여러 성(城)을 근거로 활동하던 백제저항군을 진압했으며 한성주(漢城州:경기 광주)에 머물면서 군사를 파견해 마침내 보장왕의 항복을 받는 등 삼국통일을 하는데 큰 역할을 했었다. 

문무왕이 언제 태어났는지는 명확하지는 않다. 661년 왕위에 올랐는데 그로부터 130여 년 전인 532년에 그의 선대였던 구형왕이 이곳에서 5년쯤 머물다가 세상을 떠났다. 구형왕은 서기 521년 가락국(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으로 등극하였다. 신라의 위협이 없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가야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었던 것은 구형왕은 판단을 했던 듯하다. 

조선왕릉도 여러 곳을 방문해 보았지만 우선 많이 걸어야 하고 접근성이 좋다고 볼 수는 없지만 가락국양왕덕양전은 상당히 접근성도 좋고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보았을 때 조선왕릉보다 상당히 잘 갖추어진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산청군에 자리한 덕양전은 인덕문과 함께 직사각형의 돌담을 두르고 그 안에 홍살문, 영전각, 안향각, 추모재, 동재, 서재, 해산루 등 건물이 들어서 있다. 

신라에 병합이 되고 나서 구형왕은 가락국시조김수로대와으이 태왕궁지인 가락 지품천 방장산 속 태왕산으로 옮겼다. 태왕산은 수정같이 맑은 물이 샘솟고 있어 궁궐의 이름을 수정으로 편액하고 수년간 은거하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세종, 무력, 무덕 세 아들을 비롯하여 김유신과 5대 외손으로 신라의 제30대 문무왕 등이 번성하였다. 

가락국(駕洛國)이라는 표현은 낙동강 하류에 일어난 나라들을 모두 통틀어 말한다. 가야라고 하지만 그 안에는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부족국가들의 연합형태였다. 금관가야는 본래 구야(狗邪)·가락(駕洛: 伽落)·가야라고 불렸던 것으로, 뒤에 6가야의 하나로 ‘금관가야’라 이름 지어진 것이 아닌가로 추정을 하고 있다. 

가락국의 역사에 대한 의미를 담은 비도 이곳에 세워져 있다. 고령등에 자리한 가야를 북가야, 아래쪽에 있기에 남가야라고 부르기도 했었는데 구형왕 이후에 금관가야가 신라에 편입되면서 원래 신라의 골품제의 김 씨와 구분하기 위해 신김씨라고 부르기도 했다. 

김해도 여러 번 가보았는데 그곳에 가면 구지봉이라는 곳이 있다. 김해지역의 9간(九干)이 구지봉(龜旨峰)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알을 수습하여 집에 가져오니 모두 사람이 되었다. 그중 한 사람이 수로왕으로 ‘가락국’을 세웠다고 한다. 

시간이 있다면 산청군의 조금은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이곳을 방문해 보기를 권해본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삶이 죽음으로 죽음이 삶으로 이어지는 인연의 고리를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가락국기에는 시조 수로왕, 제2대 거등왕(居登王)부터 제10대 구형왕(仇衡王)까지 역대 임금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으나, 그 밖에 금관가야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고 한다. 선사시대는 아닐진데 불구하고 가야에 대한 기록은 고구려, 백제, 신라에 비하면 상당히 미흡하다. 

김유신은 자신의 증조할아버지였던 구형왕을 마시기 위해 왕릉 옆의 터에 단을 쌓아 왕의 침궁이었던 수정궁을 옮겨졌고 제향을 받들었다. 이곳에 가면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묵직한데 무겁지는 않으며 색감이 촉촉하면서도 포근한 느낌이다. 산청이라는 지역이 원래 그런 느낌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마치 자신의 집을 아늑하게 꾸며놓은 구형왕의 성향이 반영된 공간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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