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부흥을 꿈꾼 사찰이 자리했던 천안의 천흥사지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함께 도(道)로 나아갈 수는 없고, 함께 도(道)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도 입장(立場)을 같이 할 수는 없으며, 입장(立場)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상황에 따른 판단을 함께 할 수는 없다." - 공자
한반도에서 하나의 국가가 수립되는 데 있어서 가장 역동적인 시기가 언제였을까. 백제와 고구려 패망 이후에 신라가 통일하는 과정에서의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가 않았으며 당나라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으며 조선은 이미 국가가 수립되어 있는 기반아래 역성혁명을 통해 이 씨 왕조를 세웠기에 그 여파가 왕 씨를 제외하고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고 볼 수가 있다.
하늘을 흥하게 만든다는 의미의 딴 이름의 저수지가 천안에 자리하고 있다. 천흥저수지의 아래에는 옛 고려의 사찰인 천흥사지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오 층 석탑과 비롯하여 당간지주만이 남아 있지만 최근 발굴결과 고려 최 최대급 규모의 왕실 사찰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천안시는 추가 발굴조사 지원은 물론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지정과 복원까지 추진한다는 계획을 실행해나가고 있다. 통일신라의 말기에 견훤의 백제와 궁예의 고려가 공존했던 시기는 100여 년이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삼국시대를 열고 한반도에서 왕조를 수립하기 위한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났다.
왕건은 격변의 시대에 전국에 자리한 호족들과 연대를 하였다. 그 연대는 혼인과 함께 이루어졌기에 수많은 혈연관계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전국의 곳곳에 고려의 부흥을 염원하기 위한 사찰등을 건립하였다.
고려 태조왕건은 천안지역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늘아래 편안하다는 천안에는 왕건과 관련된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최근에 발굴조사 결과 천흥사지에는 고려 대사찰의 면모가 드러나고 있다고 한다.
천흥사지는 2019년 4월부터 7월까지 1차 발굴조사, 2020년 11월부터 2021년 5월까지 2차 발굴조사에 이어 2023년 1월부터 현재까지 3차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세 차례 발굴조사로 20여 동 건물지가 확인됐지만 천흥사지 전체적으로 발굴조사가 5분의 1도 진행되지 않아 고려 초 사찰 건물지 유적 중 최대 규모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천흥사지를 처음 방문해 본 것이 10여 년 전이었는데 그냥 옛 영화만을 간직한 사찰이었는데 최근에 발굴을 통해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3차 발굴조사에서는 '천흥(天興)', '천흥사(天興寺)', '천흥사 삼보(天興寺 三寶)', '대목악군(大木岳郡)' 등 천흥사 지명과 관련된 한자가 새겨진 기와를 비롯해 바닥에 '천흥사 우(天興寺 右)'라는 글씨가 새겨진 청동 접시, 송나라 동전인 '황송통보(皇宋通寶)' 등이 수습됐다고 한다.
시대마다 가람배치는 그 시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흔적이다. 인도어의 상가라마(Saṃghārāma)는 승가(僧伽)란 중(衆), 람마(藍摩)란 동산[園]의 뜻으로 이는 중원(衆園), 즉 여러 승려들이 한데 모여 불도를 닦는 곳이다. 가람배치의 형식은 중국의 궁궐건축과 인도의 불탑(佛塔) 요소가 복합되어 형성된 것으로 이것이 한국에 전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천안에는 태조왕건의 영원을 담은 태조산과 고려의 부흥을 꿈꾸고 건립한 천흥사등이 자리하고 있다. 고려시대부터는 풍수지리설과 선종 등의 영향으로 산지가람배치가 주류를 이루었다.
삼국지에 못지않은 스토리텔링이 있었던 후삼국시대을 열었고 나주를 비롯하여 곳곳의 호족들과의 연대를 통해 왕조의 틀을 잡았던 태조 왕건은 전국에 사찰을 세웠다. 그리고 지금까지 태조 왕건이 내린 지명과 성씨들은 유지되고 있다. 가장 다이내믹한 시대를 열고 죽음의 위기에서도 다시 일어났던 그 시기를 기억하던 역사가 천흥사지에 있었다. 공자의 말씀처럼 그렇게 평생을 함께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