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을 산 아이가 13세를 기억하며 유수 같은 시간을 원망하는 태세가 우습다. 한탄조가 계속되고
"엄마는 몇 배나 살았는데 시간이 너무 빠르다고 느끼지 않아? 난 고작 16년을 살아도 이런데?"
"엄마는 말이지......"
이렇게 시작하면 으레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온다. 그리고 아이는 눈으로 '교훈은 그만'을 발사하는데, 오늘은 다르다. 하는 말씀을 듣겠다는 안온한 눈빛이다. 이런 기회가 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얼른 말을 잇는다. 만약 이때 뜸을 들이거나 "어~"를 연발했다가는 기회를 잃게 되기 마련이다.
'엄마가 여기까지 오면서 인생 전체의 1/5인 9~10년이 가장 길게 느껴져. 사람이 무엇인가 몰입할 때, 그 활동하는 동안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거나 길게 느낀다잖아. 고개를 들어보니 시간이 많이 지나 놀랄 때가 있지 않니? 엄마는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하루에 수십 개의 글 쓸 소재가 보이고, 그것을 몇 개의 글로 적으면서 시간이 느리게 간다고 느꼈어. 그러니 4/5의 전반기보다 1/5인 요즘이 더 길어 보여. 사람이 새로운 것에 집중하면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게 느낀데. 너도 시간을 느리게 가도록 만들어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더 간략하게 말했다.
"엄마가 글 쓰면서 시간이 느리게 흘러. 그래서 최근 10년이 길고 길게 느껴지네."
아이는 중3. 중2병도 크게 앓지 않았지만, 유순하던 유아, 초등시기의 성향을 생각하면 자기 생각을 고집하거나 언성을 높이는 등, 큰 반향을 보이며 중2를 어찌어찌 보냈다. 그리고 금세 중3이 되었는데 조금 더 성숙하고 깊어졌는지 부모의 말을 헛으로 듣지 않으려는 요즘이다. 분명 작년에는 아빠의 말은 경청하면서(사춘기에 아빠와 더 가까워진 신기한 사연은 다음으로) 엄마는 말을 꺼내지도 못했는데, 아이가 변한 게 분명하긴 하다.(그때, 아이는 중2였고 나는 명언병, 교훈병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말만 꺼내면 훈수를.....)
시간이 빨리 흐른다는 아이의 말속에 후회와 아쉬움과 불안과 두려움이 숨겨져 있음을 안다. 해 놓은 것도 없고 마음으로는 계획하지만 제대로 다 하지는 않고 흥미를 쫓아 시간을 잠시 허비하곤 하는 자신이 못내 불만스러운 것이다. 거대하게 부풀려 불안을 조장하는 입시라는 현실을 모를 리 없으니 아이의 불안은 두텁기만 하다. 아이는 불만족한 자신을 통해 어두운 미래를 앞당겨 조망하는 탓에 기쁨도 즐거움도 여유도 만족도 없는 일상을 보내는데, 고민을 하는 중3이라면 비슷하지 않을까. 이런 대화에서 말을 잘해야 함을 나는 안다. T성향이 강한 나는 공감하고 함께 걱정하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아이의 계획이 무엇인지 물으며 내 속내를 숨긴다. "그냥 하면 돼. 걱정하는 그 시간에 움직여. 김연아를 봐, 연습하는데 계획과 생각할 필요 없이 그냥 한다는 그녀를 알잖아"라고. 질타하고 탓하려는 마음을 심연으로 밀어 넣는다. 가족의 평화는 극도의 노력으로 가능함을 첫 아이를 통해 예행연습한 저력이 빛나는 순간이다.
"원장님, 우리 애를 포기할까요? 저는 열심히 한다는데 늘 핑계에 거짓말에 성질만 부려요" 포기하라고 할지, 잔소리는 줄이라고 할지, 다르게 대화를 하라고 해야 할지 고민한다. 살아본 부모는 아이의 여유를 다그쳐 좀 더 열의를 다하기를 종용한다. 아직 살아보지 못한 아이는 자신의 최선이 부족하다는 질타에 분노하는 게 당연하다. 공부법을 논하는 수많은 콘텐츠에서도 정신 차리고 더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아이들이 모를 리 없다. 세상은 참기 어려울 정도로 혹독하며, 살면 살수록 지식이나 전문성이 없이는 버텨내기 어려움을 부모세대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게다가 예상 못하던 전쟁이 발발하고 오일파동이 생기며 곡물대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전 세계가 일일생활권이 된 지 오래라 먼 나라의 바이러스는 금세 안방까지 도착해 일상과 사회를 멈추게 만들기도 하는 게 삶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으로 감당할 수 없을 재해는 곳곳에 숨어있고 언제 들이닥칠지 우리는 예견하지 못한다. 부모세대의 우려는 이런 불안정을 기초한 것인데,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까? 공부를 닦달한다고만 느낄 수 없어 갈등은 증폭되기 일쑤다.
과거 농경사회는 제의를 지내고 하늘신을 달래서라도 풍운을 부려 흉년을 면하길 바랐다. 세상의 이치는 정해있고 큰 불운으로의 재해와 외세의 침략이 아니라면 예측한 한평생을 살아갈 수 있었다. 선조의 지혜와 경험칙 중요했고 배워야 할 지식과 정보의 양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요즘 어디 그런가. 예측할 수 있는 영역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요즘 같아서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예측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부모의 슬하에, 제도권 교육 아래 공부라는 고생 정도를 하는 아이들은 세상의 격변을 구체적으로 인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기성세대가 던지는 굵직하고 잔잔한 경고와 잔소리와 윽박지름이나 고성에 넌더리가 날 수밖에 없다.
이 간극을 어떻게 좁힐 수 있을까? 가정마다, 부모의 성향마다, 양육의 방식에 따라 엄격하거나 방임하거나 민주적이거나 앞의 방식이 혼합으로 아이들과 조율한다. 나는 현재 민주적이라고 하면서 존중을 말하는데 엄격하지 못하다. 아이의 자율성을 존중한다지만 방임에 가깝다. 이유는 아이의 성향이 주도적이고 자기주장이 분명하며, 스스로 자신의 수준을 파악해 보완하는 성향임을 일찍 알았기 때문이다. 코로나 2년 동안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깊이 몰입하고 소기의 성과를 경험한 아이였다. 자유롭게 즐기던 초등을 졸업하고 중등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자신의 학습법을 미미하게나마 찾아가고 있다. 학습법을 찾고 습관을 파악하고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알고 있다. 이 말은 공부 습관을 형성했다는 말은 아니다. 실행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부모가 원하는 만큼의 실천. 좋아하는 것을 먼저 할 게 아니라 학습량을 늘려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 늦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저도 알고 나도 알지만 잔소리하지 않는다. 갈등을 피하고 싶기도 하고, 조율을 위한 갈등으로 아이의 공부할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씩씩거리며 분하게 하는 공부 2시간 보다, 스스로 시간을 설정하고 목표를 이루려고 하는 30분이 더 효율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이를 믿는다기 보다는.
고등학교 진학한 상위권 제자들은 할 게 너무 많아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학습시간을 갖고 있다. 중학교에서 상위 성적이었지만 암기위주에 독서를 멀리하고 국어를 우습게 알던 아이들 중 고등학교 입학 후 이렇게 말한다.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불안해요"라고. 이런 친구들은 대부분 애매한 등급에 머물고 있다. 느려도 꾸준히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며 절대적인 많은 양의 공부를 하되, 의존한 공부가 아니라 스스로 하는 학습을 늘려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한 친구가 유독 기대가 된다. 용비어천가를 꼼꼼히 읽으며 문제풀이까지 하는데 또래의 3배가 걸리는 친구였다. 대충 보라고 해도 이해가 안 되면 못 넘어가는 아이였다. 학습법을 바꾸지 말고 매일 꾸준히만 한다면 이해속도, 처리속도는 점점 빨라지고야 만다. 진지하고 신중한 아이의 성향은 분명 빛을 볼 것이다. 아직 미미한 현실이긴 해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돌아와, 내 아이가 숨이 턱에 차오를 정도로 학습하면서 고등을 준비하길 바라는 마음은 가득하지만, 부모의 원함 만큼 움직이지 않을지라도 일단 아이의 스타트를 믿고 기다리고 싶다. 스스로 경험하고 찾아낸 방법이 느려도 가장 빠르거나 강한 동기부여라고 믿기에, 스스로에 대한 불만족을 쌓고 실수의 기회통해 찾아가도록 허용하고 싶다. 현실을 모를 리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