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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charlie Jul 18. 2019

고독이 형상화된 실루엣

<첩혈쌍웅>

고독한 킬러의 모습을 한 주윤발

“장 피에르 멜빌은 나에게 신이었다.” 오우삼 감독은 자신에게 영감을 준 수많은 영화와 인물 중 가장 앞줄을 장 피에르 멜빌을 위해 비워두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일련의 범죄 필름 누아르에 영향을 받은 장 피에르 멜빌은 이를 프랑스로 가져와 이른바 ‘프렌치 누아르’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런 그의 영향을 받아 80년대 중국 반환을 앞둔 홍콩을 배경으로 오우삼은 ‘홍콩 누아르’를 선보인다. 프렌치 누아르가 예민하고 과묵한 범죄자, 의도적으로 회색빛 톤을 배경으로 건조하고 냉혹한 파리의 이면을 통해 특유의 스타일을 정립했다면, 홍콩 누아르는 고독과 우수에 찬 표정의 범죄자, 홍콩 반환의 불안함과 대비되는 화려한 홍콩의 야경을 내세워 묘하게 음울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킬러의 이미지를 차용한 <사무라이> 속 알랭 드롱

누아르 장르는 사실 정형화된 장르적 특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내러티브보다는 특징적인 시각 스타일이나 분위기가 더 강조된다. 눈에 보이는 허술한 개연성은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영웅본색이 홍콩 누아르의 시작을 알린 작품이라면, 홍콩 누아르의 절정으로 인정받는 작품이 바로 ‘첩혈쌍웅’이다. 장르 개척에 성공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진 오우삼은 장 피에르 멜빌의 대표작인 ‘사무라이’에 대한 헌정과 같은 작품으로 첩혈쌍웅을 완성했다. ‘알랭 들롱’이 연기한 과묵하고 냉정한 킬러 ‘제프’는 ‘주윤발’이 연기한 ‘아송’으로 그대로 이식되었다. (심지어 해외 번역판의 인물 이름은 똑같이 ‘제프’이다.) 의뢰받은 청부살인이 라이브 바에서 일어나고, 여가수와 얽히게 된다는 설정 역시 가져온다. ‘사무라이’ 이야기의 기본 골격과 시각적 스타일을 계승하고 있다.

권총 액션의 일인자

     첩혈쌍웅이 ‘사무라이’의 계승에 그치지 않고, 이 영화만이 가지는 매력과 차이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첫 번째로 캐릭터의 활용을 들 수 있다. 사무라이의 제프가 냉정함을 유지하며 완벽한 계획하에 능수능란하게 경찰을 따돌리는 마치 신과 같은 면모를 선보인다면, 첩혈쌍웅의 아송은 십자가 앞에서 갈등하고 괴로워하는 한낱 인간의 면모를 선보인다. 이런 설정으로 인해 드라마가 풍성해지고 선악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여 범죄자인 ‘아송’에게 관객들이 동화되는 효과를 가진다. 무능력한 ‘사무라이’ 속 경찰과 달리 첩혈쌍웅 속 ‘이 경위’는 ‘아송’과 대척되는 지점에 있지만, 감정적으로 연대하며 고독함과 외로움이라는 영화적 분위기를 한껏 고취시킨다. 이 경위는 절대선이지만 조직 내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이며, 아송은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하고 절대악의 악당들이 등장한다. 어디에도 완벽한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무협 장르가 이식된 액션 시퀀스이다. 쾌감을 느끼게 해주는 화려하고 현란한 총격씬은 무협영화의 동선 연출에서 가져왔다. 단지 칼에서 총으로 바뀌었을 뿐, 그들의 무대는 무협영화 속 강호와 무림과 다르지 않다. 고수와 하수의 경계도 분명히 존재한다. 범죄물과 웨스턴 장르에서의 총격 액션과 달리 무협이 가미된 스케일 큰 동적인 연출은 판타지적 폭력 미학을 완성한다.

흰 옷을 입은 두 남자, 적이자 친구

     이 작품이 홍콩 누아르의 ‘정점’이라고 불리게 된 지점은 결말에 있다. 주인공 혹은 주요 인물의 죽음을 통해 냉혹함과 허무주의적 결말이 주를 이루는 필름 누아르의 특성상 ‘사무라이’나 ‘첩혈쌍웅’에서 주인공이 맞는 죽음의 결말은 낯설지 않다. 주목해야 할 점은 ‘눈’이다. 자신이 행한 총기사고로 인해 시력을 잃어가는 연인의 상황과 그녀를 위해 자신이 잘못될 경우, 자신의 눈을 연인에게 이식해달라는 소망은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불완전한 눈을 통해서 홍콩 반환 전 미래에 대한 불안에 젖은 당시 홍콩인들의 심리를 담아낸다. 그런 불안의 정서 속에서 ‘아송’이 눈을 잃으며 맞이하는 죽음은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삭제당함과 동시에 허무주의의 절정에 다다른다. 그 유명한 비둘기 씬 역시 성당 안 촛불을 하나씩 꺼트림으로 순백이 선사하는 어두움이란 극과 극의 효과를 자아낸다. 더 이상 선명하지 않고 점점 흐릿해져 간다. 희망이 사라져 가고 선악이 모호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불안감으로 가득하다.

이내 피로 물든 흰 옷의 두 남자

     이 모든 영화적 해석과 매력은 결국 누아르 특유의 스타일에서 비롯된다. 중절모와 트렌치코트, 반듯한 머리와 말끔한 슈트는 사실 외형적 매력보다는 그 안의 외로움과 고독을 감추기 위한 위장이다. 개인의 개성 발현보다는 정제된 슈트 차림이 감정과 욕망을 억누르는 인물의 무표정으로 더욱 극대화한다. 인물이 만들어낸 스타일에서 모든 게 시작된다. 그 감정의 절제가 흔들리고 무너지는 순간 사건이 발생하고 비극을 초래한다. 자신을 위한 총알 한 발을 늘 남겨두는 남자의 뒷모습은 결국 캐릭터 자체로 한 편의 영화가 되었다. 고독함이 형상화된 실루엣이 화면을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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