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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진 Nov 09. 2017

릴라 따라쟁이 레누의 막장 스토리

독서테라피 7.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완전히 새로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지금까지 너무 잘못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족, 친구, 지역을 바꾸고 나조차도 바꾸고 싶었습니다. 날 알고 있는 사람과 인연을 차단하고 새로운 사람들 앞에 새로운 나로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가족을 떠날 용기가 나지 않았고, 회사를 떠날 용기가 나지 않았고, 과거의 나를 지우고 새로운 나로 포장할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삶을 리셋하려면 방법은 떠나야 한다는 것 하나뿐이었습니다. '지방에 내려가서 막일이라도 하며 새로 시작해볼까?' 30대 중반을 넘어 40을 향해 달려가던 어느 날, 저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페이스북을 시작하며, 회사를 옮기며 용기를 얻었습니다. 평생 서울에서만 살던 제가 회사 앞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고, 길도 모르는 곳 인천에서 새로 시작했습니다. 페이스북을 통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가족 외의 모든 주위 사람을 리셋 시켰습니다. 가족까지 리셋 시키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저는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세상이 바뀌더군요. 새로 태어난 느낌이라고나 할까. 과거의 나를 모르는 사람들 뿐이라 새 출발이었습니다. 마치 신분세탁을 한 것처럼요.


도망치는 것보다 쉬운 해결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도망치지 않고 모든 걸 바꿀 수는 없나 봅니다. 그래서 저는 도망치기를 잘 하는 것 같습니다. 해결해보려고 노력하다가 안 되면 리셋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이직을 자주 하나 봅니다. 지금 회사에서 내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다는 판단되면 리셋. 지금 삶에서 내 능력으로 변화시킬 수 없으니 내 삶도 리셋. 사람이 생을 두 번 살 수 있다면 '자, 연습해봤으니 본격적으로 새로 살아볼까?'라며 다시 아기로 태어날 수 있을 테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하지만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리셋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제 삶을 리셋 시킨 것처럼, 릴라가 삶을 리셋 시킨 것처럼, 레누가 삶을 리셋 시킨 것처럼요. 리셋 시키기 위해 도망친 그녀들의 삶이 마치 제 삶처럼 느껴졌습니다. 남편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니노와 엔초를 선택한 릴라, 고향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잘 나가는 교수와 결혼한 레누는 삶을 리셋 시키기 위해 도망칩니다.


(3권까지 읽었지만) 나폴리 4부작 중 가장 재밌게 읽었습니다. 앞부분부터 매우 흥미롭습니다. 소설가로 성공한 레누 얘기가 나오거든요. 레누의 첫 소설은 대박을 칩니다. 대박도 그냥 대박이 아니라 초대박입니다. 돌풍처럼 나타난 신인 여성작가의 책은 찍어내는 족족 팔려나갑니다. 그녀는 책이 잘 팔리며 유명인사가 되고 여기저기 초대받아 다니느라 바쁩니다. 인생의 황금기가 따로 없습니다. 하지만 릴라는 햄 공장에서 착취에 시달립니다. 열악한 근무조건에, 성추행에, 임금체불까지. 레누와 릴라의 상황은 완전히 대역전입니다. 부잣집에 시집가서 돈을 펑펑 쓰던 2부와 달리, 해고당할까 걱정하며 겨우겨우 살아가는 릴라. 그런 릴라를 부러워했지만 교수와의 결혼을 앞둔, 소설도 대박 나서 돈이 차곡차곡 쌓이는 레누. 이 둘은 금전적으로 보면 완전히 역전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게 다면 재미없겠죠?


릴라를 질투하고 릴라 따라쟁이로 살아온 레누는 또다시 릴라에 집착합니다. 결혼과 동시에 평탄한 인생이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레누는 두 아이를 키우느라 자신의 삶이 없어졌습니다. 요즘 쓰이는 말 그대로 독박 육아, 군대 육아에 소설 쓸 시간도 없습니다. 이렇게 살다가는 자신의 인생이 그대로 종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릴라는... (아핫, 줄거리는 여기까지만.) 그리고 어쩌고저쩌고...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이 니노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니노의 아들을 키우는 릴라, 니노를 짝사랑하는 레누. 이 둘의 애증적 관계는 결국엔 니노 때문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남자를 두고 두 여자의 피 말리는 신경전이 막장드라마처럼 펼쳐지거든요. (어쩌면 엘레나 페란테가 한국 드라마를 즐겨보는 걸 수도요) 막장으로 흘러가는 듯하면서도 저급하지 않아 신기합니다. 이 막장 같은 스토리 때문에 이 책을 비난하는 사람도 은근 있더군요. 하지만 소설이 꼭 스토리만 중요한 건 아니기에... 음... 암튼, 니노는 남자인 제가 봤을 땐 쓰레기 같습니다. 도대체 몇 명의 여자에게 사랑받는 건지... (질투 아님.)


책이 상당히 두꺼운데요, 두껍다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빠르게 읽힙니다. 왜 엘라나 페란테 소설에 사람들이 열광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을 정도로 잘 읽힙니다. 솔직히 1, 2권은 '음,,, 그렇군. 근데 언제 재밌어지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드디어 3권에서 이렇게 흥미진진하게 이야기가 펼쳐져서 만족하다고나 할까. 그리고 4권이 정말 기대됩니다. 이 두 여자와 인기남 니노의 막장 스토리가 도대체 어떻게 결말을 맺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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