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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실 Aug 17. 2020

시리아 출신 스웨덴의 인권 변호사, 샤비아를 만나다

꿈이나 목표를 종이에 적으면 그대로 이뤄진다는 이야기를 어느 자기 계발서에서 본적이 있다. 1996년 시리아에서 17살의 샤비아는 세계 지도가 그려져 있는 노트에 스웨덴의 도시, 말뫼를 색칠한다. 그 도시가 자신이 그 후로 7년 후에 이주할 곳이라는 걸 모른 채로 말이다. 국가가 없는 유일한 민족, 시리아 쿠르드족 출신으로 태어나 생후 9개월 소아마비 진단, 이로 인해 13년 동안 가족과 떨어진 채 병원생활, 이후 시리아 내전으로 선택권이 없이 스웨덴으로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인생을 단지 시련 많은 사연으로 풀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시리아 최초의 여성 장애인 변호인이자, 현재는 스웨덴을 기지로 삼아 중동 출신 장애인과 여성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샤비아 알리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 스웨덴 사회를 만나보자.

샤비아 알리



샤비아 씨는 현재 스웨덴에서 거주하고 계신데요. 시리아에서 태어났고, 성장기 내내 스페인에서 자랐다고 들었습니다. 그동안 이동을 해야 했던 사연이 궁금합니다.


저는 1980년에 시리아의 작은 마을 코바니에서 태어나고 9개월 후에 소아마비를 앓았어요. 소아마비는 위생적이지 못한 생활환경 때문에 쉽게 번지는 바이러스죠. 시리아의 기반시설들은 매우 좋지 않아요. 주로 오염된 물을 통해서 소아마비 바이러스가 전염되는데 저의 경우에는 사지를 마비시켰어요. 지금 제 몸은 오른손과 왼손 일부를 제외하면 전신이 흐물거리는 생명체처럼 힘이 없어요. 그래서 전동휠체어를 타고 지냅니다. 어떤 경우에는 소아마비가 폐 근육을 마비시킬 수도 있는데, 그것에 비하면 전 호흡할 수 있어서 감사해요. 저희 부모님은 제가 3살 때, 저를 스페인에 사는 삼촌 댁에 보내서 치료를 받게 하셨죠. 스페인 마드리드의 한 병원에서 제 대부분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아마 저의 내면의 깊은 고독이 그 시기에 자라난 것 같아요. 삼촌과 외숙모가 저를 딸처럼 아껴주시긴 했지만, 부모님과 형제를 13년 동안 못 본 다는 건 성장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빈자리를 만들었을 거예요. 외롭긴 했었지만, 병원에서 만난 좋은 자원봉사자들이 기억에 남아요. 봉사자 언니들이 공부도 가르쳐주고 친구가 되어 줬어요. 그 경험 때문에 좋은 자원활동이 한 사람의 인생에 빛을 가져다준다는 걸 알았어요.

스페인에서 살다가 또다시 시리아로 돌아오신 이유가 있었나요?


저를 돌봐 주시던 삼촌께서 갑자기 실명을 하셨거든요. 삼촌이 시각장애인이 되니까 외숙모는 저까지 데리고 살기가 힘들어지셨어요. 저를 다시 시리아에 있는 부모님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때가 제 나이 14살이었는데, 문제는 제가 전혀 아랍어와 쿠르드어(쿠르드족 고유언어)를 못하는 거였어요. 왜냐면 전 3살에 스페인으로 보내져서 모국어가 스페인 어니까요. 엄마는 그런 저랑 소통을 하기 위해서 ‘쉬운 스페인어’ 책을 집에 두시고 보신 기억이 납니다. 제가 본국에 돌아와서 아랍어를 유창하게 하기까지는 3년이 걸렸어요.


이후 시리아에서 최초의 여성이자 장애인으로서 법대를 당당히 입학하셨는데요. 법학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있었나요?


전 사실 역사, 정치, 철학, 사회과학을 좋아했어요. 막상 대학을 가려고 전공을 탐색하는데, 장애학생들이 유독 많이 선택하는 게 인문학이었어요. 그런데 장애인은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진부한 편견을 깨고 싶다는 도전정신이 제게 있었다고 할까요. 사람들이 제가 휠체어를 탄다는 이유만으로 저의 가능성을 미리 재 놓는 게 싫었던 것 같아요. 게다가 알레포 대학교에서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물이 법과대학 유일했거든요.(웃음) 그래서 법대로 지원했죠. 그런데 합격해서 부푼 기대로 학교를 간 바로 첫날, 그 엘리베이터가 이미 오래전부터 고장 났다는 걸 알았습니다. 학교에 건의를 해보아도 고쳐지지 않아서, 저는 지역구 정치인에게 가서 도움을 호소했어요. 그런데 제게 돌아온 말은 “혼자 돌아다니지도 못하면서 왜 굳이 법을 공부하려고 하냐.”이었습니다. 학교도 가지 않고 2개월간 침대에서 우울한 시간을 보냈어요. 여러 가지 질문들로 괴로웠어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어요. 이제 막 세상을 향해 나왔는데 넘어서야 할 첫 번째 난관에 부딪힌 느낌이었어요. 


스스로 결단을 내려야 했어요. 엘리베이터가 안 되는 걸
내 장애가 잘못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관두고, 이 사회의 장애인을 향한 차별에 맞서는 사람이 되야겠다고요. 


 법은 제가 세상과 싸우는 유용한 도구입니다. 단순히 ‘그래야 한다’는 믿음이나 도덕적 당위성에서 끝나지 않아요. 법은 실질적으로 인간의 삶에 개입하고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시리아에서 장애인을 위한 어떤 일들을 했나요?


교내에서 학회를 조직했어요. ‘시리아 장애인을 위한 문화 학회’라고 이름 짓고, 장애학생들을 모집했어요. 그때는 소셜미디어가 없어서, 말 그대로 물어 물어 장애학생들을 찾았어요. 병원, 자선단체, 물리치료실 등등에 전화해서 학회에 가입시킬 장애인들을 모색했죠. 그만큼 시리아에서 장애인이 거리에 나오기가 어려운 환경이고, 대학을 다닌다는 건 더더욱 보기 드문 일이었던 거예요. 그렇게 조직된 5명이 모여서, 프로젝트를 만들었어요. 우리끼리 모여 장애인 이동권, 학습권, 사회통합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우리 주변의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이 자라나기 시작했어요. 가장 먼저 교내의 접근성을 개선했어요. 학교에 경사로를 설치하고, 엘리베이터를 고쳐달라는 요구를 했죠. 그리고 대학에서 시험을 치를 때 장애학생에게는 추가시간을 보장하고, 시험장이 휠체어로 들어가기 편한 곳으로 배치하는 등의 성과가 있었어요. 점점 학교에서 알레포 시 전체로 이 운동이 확산되어서, 정부 차원의 간담회를 여는 등 시리아에서 활동한 4년 동안 많은 성과가 있었어요.

샤비아 알리와 학회원들

그리고 지금은 스웨덴에서 시민권을 갖고 계신데요. 어떻게 스웨덴으로 와서 변호사 활동을 이어가게 되었나요.


스웨덴에 올 계획은 전혀 없었답니다. 2011년에 아버지가 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시고, 2012년 시리아 내전이 일어나면서 저에겐 선택지가 없었어요. 스웨덴으로 피난이 사는 유일한 길이었으니까요. 2012년에 스웨덴에 난민으로 입국했어요. 스웨덴 사회에 융화가 되려면 공부를 하는 게 가장 쉽겠다는 생각에 룬드대학교 국제 인권법 과정에 석사를 시작했죠. 그리고 스톡홀름에서 장애 난민을 위한 프로젝트에서 법률 파트를 담당했어요.


일반적으로 이주자는 다른 문화,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에 맞닿드리곤 하는데요. 장애를 가진 난민들에게는 이중으로 어렵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떤 지원이 필요한가요.


스웨덴에 난민신청을 하면 대게 짧게는 2년 길게는 10년 동안을 기다려서 승인을 받아요. 그 기간 동안에 장애를 가진 난민들은 생활에 필수적인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게 문제예요. 저는 그들의 입장에 서서 스웨덴 정부, 지자체와 커뮤니케이션을 돕고 중재하는 일을 했어요.그리고 문화차이로 인한 오해도 풀어줘야 합니다.


스웨덴에 거주하신 지 이제 7년째 되는데, 시리아와 비교해 보았을 때 스웨덴에서 장애인으로 사는 삶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스웨덴은 장애인이 독립적으로 살아가기에 좋은 나라예요. 하지만 완벽하지 않아요. 장애인에 관련한 법과 제도가 여전히 장애인을 복지 서비스 수혜자로 여기는 것 같아요. 장애인을 자원(Resources)으로 보기 보다는요. 그리고 그 모든 복지는 장애인 당사자의 필요의 범위가 아니라 경제의 원리로 정해집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가치에는 아직 미흡한 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운전면허증을 따려면 제 장애 때문에 특별히 개조된 차를 개인적으로 구해야 하는데 그 비용이 일주일에 200만 원이었어요. 그 말은 제도적으로 저와 같은 장애인의 권리를 조용히 묵인하는 거라고 봅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저는 올해 가을부터 국제연합 (United Nations)의 산하 기관, 국제연합 개발계획(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me)에서 국제 인권법 전문가로 일할 예정입니다. 시리아, 이라크, 예멘은  전쟁 때문에 도시들이 붕괴됐어요. 전쟁 후 그 나라가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에 기여하고 싶어요.  특히 그 땅에는 전쟁으로 후천적인 장애를 입은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장애인을 사회의 구성원으로 참여가 가능하도록
나라의 기반을 다시 만들어야합니다. 

 앞으로 인생이 저를 어디로 이끌지 모르겠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저는 장애인 편에 서서 싸움을 멈추지 않을거에요. 





사회복지사 전문잡지 '소셜워커' 2020년 8월호(Vol. 213)에 실린 글입니다.


다음호는 [모두에게 열린 스웨덴의 자연, 휠체어로 가다]입니다. 많은 기대 부탁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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