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붱 Feb 28. 2024

남편에게 산후조리를 부탁했더니

엄마는 나도 처음이라서

일본에는 우리나라의 산후조리원과 같은 시설이 거의 없다. 몇 년 전부터 도쿄 근방에 비슷한 게 생긴 것 같은데 그건 대도시니까 가능한 일이다. 내가 사는 지방 도시에서는 꿈도 못 꾼다.


일본에서는 산후조리원 대신에 친정집에 머물며 몸을 회복하는 ‘사토 가에리’라는 풍습이 있다. 실제로 친정 식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산모들은 대부분 사토 가에리를 하여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몇 달씩이나 친정에서 머물며 몸을 회복하는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내 친정은 너무 멀었다. 비행기로 편도 2시간가량이면 도착하니 가려고 하면 아예 못 갈 거리는 아니지만, 문제는 그렇게 친정이 있는 한국에 간다고 해도 나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다.


친정엄마는 일 때문에 애초에 도와주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시어머니는 처음엔 도와주겠다고 하셨다가 며칠 뒤 못하시겠다고 했다. 신생아를 케어해 본 적이 없어서 자신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처음엔 그런 친정엄마와 시어머니한테 서운한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감사하다. 덕분에 나와 남편, 그리고 우리 아기가 함께하는 새로운 일상에 우리 가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적응하게 되었으니까.


나는 산후조리를 남편이 해줬다.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지나고 보니 최고의 선택이었다.


남편은 육아휴직을 낸 한 달 반 동안 나의 삼시 세끼를 살뜰하게 챙겼다. 가짓수는 적었지만 메인요리인 고기반찬 하나와 샐러드를 매 끼니마다 챙겨줬고 국도 된장국이나 미역국 중 하나를 늘 떨어트리지 않고 만들었으며 중간중간 간식으로 과일까지 챙겨줬다. 온몸이 천근만근 한 나를 대신해 빨래와 청소는 물론 아기 케어까지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혼자서 그 모든 일을 다 하는 남편이 안쓰러워서 몇 번 설거지도 좀 하고 청소도 좀 해봤지만, 곧 관뒀다. 출산 후 너덜너덜해진 손목은 아프다 못해 시렸고, 제자리를 찾아가지 못한 골반과 척추는 제멋대로 움직이며 각종 통증을 만들어냈다.


산모들 사이에서는 출산 방법을 두고 하는 우스갯소리가 하나 있다. 자연분만의 아픔은 ‘일시불’이고 제왕절개의 아픔은 ‘후불제’라는 말이다.


아기가 나오기 전까진 미친 듯이 아프다가도 아기가 나오는 순간 통증이 싹 사라지는 자연분만에 비해 아기가 나올 땐 마취 때문에 아픈 줄 모르다가 마취가 풀리면서 통증이 시작되는 제왕절개를 카드 납부 형태에 비유한 이 말이 나는 처음엔 참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아기를 낳아 키우다 보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따로 있다는 것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바로 산모는 '환자'라는 것이다. 그것도 몸에 큰 중상을 입은.


자연분만이든 제왕절개든 출산을 한 모든 산모는 아프다. 열 시간이고 스무 시간이고 자궁문이 농구공 지름보다 더 크게 벌어질 때까지의 통증을 참고 아기를 낳은 사람이건 멀쩡한 자신의 배를 갈라 아기를 낳은 사람이건 모든 산모는 출산 후 일정 기간의 요양이 필요할 정도로 신체에 큰 부담을 입는다. 


누구는 먼저 아프고 누구는 나중에 아프다가 중요한 게 아니다. 진짜 중요한 건 출산을 한 산모에겐 절대적인 안정과 휴식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나는 출산 후 약 일주일가량을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일본은 산후조리원이 따로 없는 대신 입원 자체가 한국에 비해 좀 더 길다. 병원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자연분만인 경우 보통 일주일 전후이고 제왕절개는 이보다 더 길게 입원한다.


그렇게 일주일을 입원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퇴원 후 집에 돌아온 내 몸은 여전히 만신창이었다. 흡입분만을 하며 바깥쪽과 안쪽을 모두 절개한 회음부는 앉을 때는 물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마다 찌릿찌릿했고, 온몸은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적응되지 않았던 건 뼈 마디마디가 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은 이질감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날 때마다 허리엔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고 고관절 역시 부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마치 온몸에 뼈가 하나도 없는 연체동물이라도 된 것처럼 이리저리 제멋대로 움직이는 관절들을 느끼며 나는 생각했다. 아, 산후조리가 괜히 필요한 게 아니구나, 하고.


그 뒤로 나는 남편의 호의를 그저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남편의 육아휴직이 끝나는 한 달 반 뒤에는 이렇게 호사를 누릴 수도 없었다. 남편이 복직한 뒤엔 빼도 박도 못하는 독박 육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전에 최대한 몸을 회복시켜야 했다. 도와줄 친인척도, 지인도 하나 없는 낯선 일본 땅에서 내 아이를 무럭무럭 건강하게 키우려면 엄마인 내가 먼저 체력을 회복하고 멘탈도 강해져야 했다.


아기를 낳고 나면 그동안 평범하게 지냈던 일상이 180도 뒤바뀌게 된다. 삼시세끼 챙겨 먹는 게 어려워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하는 게 다반사다. 기저귀 갈기와 목욕시키기는 물론 젖 먹이는 것까지 모두 다 낯설고 손에 익지 않아 당황하게 되는 일이 하루에도 여러 번 일어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더 당황스러운 건 이런 일이 하루 이틀하고 끝나는 게 아니란 점이다. 육아는 며칠 반짝 고생한다고 해서 끝나지 않는다. 특히 신생아 육아는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내 새끼가 배고프다고 울고, 졸려서 울고, 기저귀가 찝찝하다고 울면 언제든지 벌떡 일어나 어르고 달래고 젖을(혹은 젖병을) 물려야 하는 것이 신생아 육아의 특징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건 내 인생의 동반자이자 영원한 육아 동지인 남편과 적절히 일을 배분하는 것이다. 누군가 기저귀를 갈면 한 명은 분유(혹은 모유) 준비를 하고, 누군가 아기를 안아 재우고 있으면 누구 한 명은 빨랫감을 모아 세탁기를 돌리고, 아기가 우는데 누구 한 명이 너무 피곤해서 차마 못 일어나고 있으면 누군가는 대신 일어나 울고 있는 아기의 엉덩이를 두드려줄 수 있어야 한다.


아기를 키우는 건 누가 누가 더 빨리 골인 지점에 들어가느냐를 겨루는 100미터 빨리 달리기가 아닌, 대략 20년이라는 긴 시간을 둘이서 어깨동무하며 달려야 하는 ‘이인삼각’에 더 가깝다.


그리고 이런 생활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처음엔 다소 힘들더라도 부부 둘이서 하나부터 열까지 서로 도와가며 해나가는 경험이 필요하다. 우리 부부에겐 남편의 육아휴직 기간인 한 달반가량이 바로 그런 시간이었다.


아기가 생후 8개월 차가 된 요즘은 그때완 조금 다른 일상을 산다. 여전히 힘들고 피곤하지만 출산 직후보다는 체력이 많이 돌아왔기에 집안일도 아기 케어도 거의 내가 맡아서 하고 있다.


그런데도 크게 불만이 없는 것은 퇴근 후 ‘오늘도 고생했다’며 내 엉덩이를 두들겨주고, 기저귀를 비롯한 고양이 모래 청소와 각종 집안의 쓰레기를 모아 버려 주는 남편이 있기 때문이다. 주말에는 하루 한 끼라도 본인이 요리를 하고 어디든 데리고 나가 바람을 쐬워주는 남편이 있기 때문이다. 일찍 퇴근을 하거나 재택근무를 할 땐 나 대신 자기 전에 꼭 아기를 씻겨주는 남편이 있기 때문이다.


서로를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우리는 앞으로도 꽤 괜찮은 레이스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산후조리를 남편에게 부탁하고 나서 얻게 된 가장 큰 수확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를 낳았고, 첫 책도 낳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