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붱 Feb 21. 2024

아이를 낳았고, 첫 책도 낳았다

엄마는 나도 처음이라서

드디어 첫 역서가 나왔다. 번역 공부를 시작한 지 딱 2년 만에, 에이전시에 등록한 지는 약 1년 만의 일이다.

이번에 번역한 책은 일본 최고령 헬스 트레이너인 다키시마 미카 씨의 책 『92세 할머니 기적의 근력운동』이다.


65세까지 운동이라곤 한 번도 해 본 적 없던 평범한 일본의 할머니가 ‘살이 좀 찐 것 같다.’는 가족들의 말에 시작한 운동을 계기로 일본 최고령 헬스 트레이너가 되기까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이 책은 작년 5월 중순쯤에 검토서로서 처음 접했다. 출판사에서는 번역서를 내기 전에 번역가들에게 이 책이 한국 시장에서 잘 팔릴 것인지, 내용은 어떤지에 대한 검토를 의뢰하게 되는데 이번 책도 그런 경우 중 하나였다.


처음엔 안 하려고 했었다. 당시 나는 출산을 한 달 앞둔 만삭의 임산부였다. 배가 너무 불러서 오래 앉아있기도 힘들었고 심지어 절박 조산 기미까지 있어서 침대에 거의 누워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결국 하기로 한 건 나중에 내 딸에게 ‘너 때문에 내가 일을 포기했다.’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렇게 작업한 검토서가 드디어 출간이 확정되고 샘플 번역까지 진행되는 데에는 또 반년 가량의 시간이 더 걸렸다. 그 사이 나는 이미 아기를 출산했고,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지옥 같은 신생아 시기를 거쳐 드디어 아기가 밤에 3시간은 이어서 자주는 ‘100일의 기적’을 경험 중이었다.


“무리라는 건 알지만 저는 선생님이 꼭 샘플 번역에 참여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이 책의 검토를 내게 의뢰했던 에이전시의 대표님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대표님의 말씀이 고맙긴 했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나는 자신이 없었다.


이제 갓 100일을 넘긴 갓난쟁이를 키우는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계약을 따낸다고 해도 마감일 안에 마음에 드는 수준의 번역을 해낼 수 있을까?


이번에도 역시나 고민되었지만 나는 결국 샘플 번역에 참여했고 기적적으로 번역 계약까지 따내게 되었다. 이때도 내가 결국 하기로 마음먹은 건 앞서 말한 이유와 같다. 나는 ‘엄마’라는 이유로 내게 온 절호의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살면서 사람은 크고 작은 기회를 만나게 된다. 모든 것이 준비된 절호의 순간에 딱 맞는 기회가 찾아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모든 것이 불안하고 덜 준비된 것 같은 시기에도 기회는 찾아온다. 내게는 바로 그때가 후자의 경우였다.


지금은 아직 아닌 것 같고 잘 해낼 자신도 없고 아기를 키우면서 번역까지 하는 건 무리인 것 같다는 생각만이 들었지만 나에게 번역을 의뢰하는 사람이 있는 이상 (심지어 경쟁까지 해서 따낸 계약인 이상) 내게도 책 한 권을 번역할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은 갖춰진 것일 터였다. 여기서 거절하는 건 프로로서 실격이며 그 이유가 내 아이가 되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나는 결국 번역을 하기로 했다.



낮에는 아이가 낮잠을 자거나 수유할 때 혹은 내가 밥을 먹는 틈틈이 아이패드로 번역을 했고, 밤에는 하루 종일 아이패드에 기록한 내용을 보며 한글 창에 한 자 한 자 문장을 적어나갔다.


그렇게 꾸역꾸역 틈나는 대로 하다 보니 어느새 끝이 보였다. 1차 완성본은 마감일 한 달 전에 이미 완성했지만 그건 정말 ‘초고’에 지나지 않았다. 모르는 문장이나 단어는 체크만 하고 넘어간 상태였기에 그 뒤로도 두 번, 세 번 계속 고치고 다듬고 다시 고쳤다.


그렇게 마감일 전날까지 작업한 끝에야 겨우겨우 완성한 내 첫 역서가 드디어 어제 세상에 나왔다. 해외에 사는 터라 아직 실물 책을 받아보지는 못했지만 인터넷 서점과 출판사 인스타 계정에 등록된 책 정보 속 ‘역자’ 란에 내 이름이 딱 박혀있는 걸 보니 괜히 눈가가 시큰해진다.


이제 겨우 첫 역서를 내었는데도 온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마음이 뿌듯하다. 나중에 우리 아기가 커서 내 말의 의미를 알게 될 때가 오면 꼭 말해줘야지. 엄마는 포기하지 않았어. 오히려 네가 태어나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릴 수 있었어,라고.






드디어 어제 제 첫 역서가 출간되었습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오늘 2편이나 글을 올리게 되네요ㅎ


제가 작업해서가 아니라 책 내용이 정말 너무 좋아서 번역하는 동안 몸은 힘들었어도 정말 즐겁게 작업했습니다. 부디 이 책이 한국의 많은 독자 분들께 사랑 받기를 바라며! :)



매거진의 이전글 출산이 맺어준 인연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