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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타일 큐레이터 Jun 05. 2024

태국의 해변가에서 쓴 글들

#0.

액체가 온도에 따라 그 성질이 바뀐다면,

장소에 따라 가치 혹은 역할이 크게 뒤바뀌는 대상들이 있다. 

도심지와 사막에서의 가치가 천문학적으로 뒤짚히는 생수 한 병과 다이아몬드,

혹은 공중에서는 목숨을 앗아가지만 바다에서는 구하는 역할을 하는 올가미 밧줄 등. 



#1. 퇴사 후 단상 

활시위를 뒤로 당기는 행위는 

더 큰 도약을 위한 장전이지

후퇴나 퇴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듯이.. 

나의 활시위는 12년 전에 이어 다시 뒤로 당겨지는 중이다. 

과녁에 도달하는 데는 1년의 시간이 걸릴 것 같다. 


퇴사를 하면서 24시간의 자유와 동시에 24시간의 숙제를 부여받았다는 점에서 

이는 100퍼센트의 자유가 아니다. 

이 숙제는 방임과 무책임한 시간이 아닌 

건설적이며 책임감 있는 인생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파수꾼 같은 존재로 날 따라다닐 것이다. 

그 숙제를 내준 사람은 바로 나다. 


지금은 비워내는 과정. 

많이 채우려고 욕심내기보다는

일단 채우기 좋은 깨끗한 그릇으로 만들어놓기. 



#2.자연과 자유 

태국의 작은 섬 코팡안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다 히피 같다.

편안한 옷차림에 머리는 헝클어져 있으며, 

태닝 된 반짝이는 피부 위로 큼직한 문신들이 뒤덮고 

맨발로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다니며 무엇보다 친절하다. 


대체로 유럽에서 온듯한 이들은 아이들도 해변에서 놀 때의 옷차림이 매우 단출하다. 

튜브나 구명조끼, 장난감 없이 맨몸으로 모래성을 쌓고 얕은 물에서 자유롭게 첨벙거린다. 

몇 달 전 도시적인 해운대의 해변에 갔을 때 봤던 풍경과 대조적이다. 

나중에 아이를 낳는다면 나도 사교육에 목매는 대신  

아이들을 1년 동안이라도 이런 환경에서 키워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자연을 느끼고 자유롭게. 

그러고 보니 자연과 자유의 '자'는 같은 한자이다 (스스로 자).


자유 :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 

자연 :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 



#3.전 세계의 학교들

산책을 하다가 시골의 한 로컬 초등학교를 지나갔다. 낡은 놀이터와 야외 강의실이 눈에 들어왔다. 

전 세계의 학교들 이미지를 모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하고 칙칙해 보이던 한국 초등학교의 풍경을 감각적으로 찍어서 sns에 전시했던 한 외국인 포토그래퍼의 작품이 신선하게 다가왔었던 기억이 났다. 내가, 그리고 거의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경험했던 것처럼 감수성 예민한 시절을 함께한 공간이니 초등학교에는 미적인 가치를 뛰어넘은 아련한 추억의 기운이 깃들어 있다. 뉴진스 Ditto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느꼈던 형용할 수 없던 감정처럼. 


photo by Andrés Gallardo Albajar



#4.해변의 저녁

나는 한적한 시골 해변의 불 켜진 저녁 풍경을 사랑한다. 

물속에 잉크가 번지듯, 잔잔하게 밀려오는 파도와 산뜻하면서도 적당히 묵직한 여름밤공기, 

다정하게 퍼져나가는 불빛과 살랑거리는 야자수 이파리를 사랑한다.

이곳의 불빛은 따스하고 사람들은 온순하다. 

심지어 개들도 온순하다. 



#5.흔들림

저녁에 바람을 쐬며 해먹에 누워서 글을 쓸 때만큼 평화롭고 행복한 순간은 없다. 

 

어릴 적 우리 모두가 흔들의자에 앉는 것과 누워서 바라보는 모빌을 좋아하는 것처럼 

인간은 흔들리는 것에 본능적으로 끌리는 것 같다.  

파도를 거쳐 항해하는 배는 도전 의식을,  

주파수의 떨림은 음악을, 

마음속 흔들림은 다양한 감정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해먹처럼 한 곳에 묶여있으면서 주는 살랑거림은 

내가 요새 원하는 정적인 안정감과 동적인 설렘을 동시에 준다. 


가만히 앉아 있는 건 똑같지만

교통체증에 갇힌 차에서의 느낌과 쌩쌩 달리는 차 속의 바이브가 완전 다른 것처럼

바람의 움직임과 함께 관조하는 게 

더 살아있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6.노을 

태양이라기보단 붉은 달 

순식간에 사라지는 순간 

둥실하고 포근한 

따뜻하고 아련한 


계절로 따지면 가을 

시간적으로나 느낌적으로나 



#7.울창함 

태국의 울창함은 4년 전 가본 말레이시아의 울창함과는 조금 다르다. 

울창함이라는 키워드로 팬톤처럼 컬러카드를 만들 수 있을 정도. 

가본 곳 중에 추렸을 땐 해당되는 장소는 

태국 코타키나발루 싱가포르 발리 서울 아마존 정도가 될 것이다. 



#8.백광 

노천 요가원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다.  

내 눈앞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이날 태양은 황금빛도 오렌지빛도 붉은빛도 아닌

하얀 백광이었다 

바다는 맑은 회색이었고 

무채색의 아름다운 일렁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수리에 맑은 폭포수가 꽂히는 각성처럼 

햇빛은 그대로 바다에 내리 꽂혔고 

그 밝게 일렁이는 빛은 그대로 내 발끝까지 이어졌다


어제저녁 어스름 신비롭고 푸른 바다에 압도되었듯이

이 무채색의 황홀한 몸짓에 다시 경외감을 느꼈다


잔잔하고 얕은 바다와 울창한 녹음 

따스한 햇살과 신비로운 달빛 


그리고 내가 이렇게 많이 하늘을 본 적이 있던가

땅 위의 세상이 조용하고 평화로우니 하늘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천둥번개와 시시각각 바뀌는 햇살의 방향, 구름의 모양, 별자리까지. 


잔잔하고 묵직한 파도가 주는 안정감과 평화가 

요가를 하는 사람들 위로 지나간다. 




#9.돌아오는 공항 안에서 

비행기만큼 제곱미터 대비 가장 다양한 스토리를 품고 있는 사람들을 촘촘히 모아둔 구조물이 있을까. 

서로의 여행에 대한 스토리텔링만 해도 비행시간 다 갈듯.

 

태국은 운전대 방향뿐만이 아니라 에스컬레이터 방향도 다르다. 

나라마다 운전대 방향이 어떻게 결정되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일본어와 아랍어의 글 쓰는 방향이 왜 다른지에 대해까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10.그냥 잡생각 

-한국 돌아가면 다시 해보고 싶은 것 : 피아노 

-요새 내가 관심 있는 것 : 세계의 건강 음식 레시피와 차 (tea)

-어떤 헤어 컬러와도 궁합이 좋다고 생각하는 매력적인 컬러 : 옐로 핑크 블랙

-내가 블렌드/믹스하기 좋아하는 것들 : 아로마오일 와인 주얼리 

-태국에 머무는 동안 질리게 본 컬러들 : 브라운 그린 블루 샌드 

-아로마테라피 세션에서 강사가 해준 말 : Smile to your future self (미래의 당신에게 미소 지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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