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사회학 #24
인류의 직접 조상인 사피엔스가 지구 상에 출몰한 이래로 노동의 목표와 가치는 시대에 따라 변화를 거듭해 왔다. 지금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노동의 목표와 가치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라는 의미다. 수렵과 채집 시대엔 생존이었던 인류의 노동 목표가 농경 시대엔 생산이 되었고, 자본주의 시대에 이르러 부가가치를 통한 이윤의 창출로 변해왔다는 것은 앞서 1장에서도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코로나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확실성의 시대의 새로운 노동 목표는 무엇이어야 할까? 그리고 노동의 가치 기준은 어디에 두어야 할까?
노동의 목표와 가치 기준은 그 시대의 목표가 생존이냐, 아니면 이익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은 생존 앞에서는 연대와 협력을 하지만, 이익 앞에서는 늘 경쟁을 해 왔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자적으로 문명을 개척할 수 있었던 본질적 이유는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저 우연한 기회에 연대와 협력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 수렵을 하던 사피엔스는 가끔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강적을 만났다. 그리고 그 강적에게 물려 죽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우연히 옆을 지나던 사피엔스 무리와 협력해 마침내 강적을 사냥하는 데 성공했다. 강적을 무찌르고 난 후 생존의 문제에서 벗어난 사피엔스는 이제 사냥한 강적을 어떻게 나눌지 이익 투쟁을 하게 되었다. 누가 더 사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중 제일 힘이 센 사피엔스가 사냥한 강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가장 힘이 약한 사피엔스는 가장 쓸모없는 부위를 차지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이제 더 이상 힘이 약한 사피엔스는 사냥에 협력하지 않게 된다. 협력을 기대했던 사피엔스는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강적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러기를 또 무수히 반복한 결과 사피엔스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생존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때까지는 자신의 동물적 본성을 드러내면 안 된다는 사실을... 사피엔스는 생존을 위해 동물적 본성을 억누르는 과정에서 이성의 능력을 키워왔고, 그렇게 자연과 분리되어 독자적인 문명을 개척해 왔다.
2018년 핀란드와 덴마크로 교육 연수를 갔던 적이 있다. 난 핀란드 국가교육위원회의 브리핑을 들으며 북유럽이 교육 선진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거대하고 척박한 땅에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가 살고 있는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은 생존을 위해 보다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을 것이다.
불공정과 불평등한 방식으로 상대적으로 열등한 사람을 배제하고 나면 정작 필요할 때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된다. 10명이 들어야 할 나무를 5명이 들고 있는데, 나무를 드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그 중 한 명을 배제하고 나면 10명이 들어야 할 나무는 결국 4명이 들게 된다. 북유럽의 국가들은 절박한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가 필요하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달았다. 그리고 교육은 그러한 북유럽 사회의 노력을 지속 가능하게 유지시키기 위해 단지 "거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교육(손가락)은 보다 공정하고 평등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달)를 가리키고 있는데, 우리는 교육 선진국인 북유럽 사회는 보지 않고, 그 사회를 가리키고 있는 교육만 쳐다보고 온다. 사회가 권위적이면 교육도 권위적이 되고, 사회가 불공정하면 교육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에 몰입한다. 혹시, 우리는 대한민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권위주의와 불공정의 문제를 가리기 위해 그 책임을 교육에 일방적으로 전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존에 문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할 즈음부터 인간은 서로 더 큰 이익을 가져가기 위해 투쟁했다. 이른바 마르크스가 본 계급투쟁의 관점이다. 생존과 이익의 관계는 참으로 오묘하다. 생존을 위해서는 이익을 추구하는 자유 의지를 억눌러야 하고, 반대로 과도한 이익 투쟁의 결과 인류는 생존이 위태로운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생존을 위해 평등을 선택할 것인지, 이익을 위해 자유를 선택할 것인지는 인류가 풀어야 할 영원한 숙제다. 단순히 가치를 대입시켜 평등이 더 옳다거나, 자유가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생존의 시대에는 평등이, 이익의 시대에는 자유가 힘을 발휘한다. 노동의 목표와 가치의 기준을 정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에게 당면한 시대의 요구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지금이 생존투쟁의 시대인지, 아니면 이익 투쟁의 시대인지... 대중들은 생존과 이익 사이에 어떠한 목표를 더 지향하고 있는지...
백수는 그동안 노동의 가치 기준에서 밀려나 있었다. 스스로 물러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말 그대로 밀려나 있었다. 이익의 시대,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백수는 이익 투쟁에서 물러나거나 밀려나면서 이익 경쟁률을 낮추는 데 기여하며 생존해 왔다.
엘도라도로 가는 배 한 척이 있다. 그 배는 단 10명만 태울 수 있다. 황금에 대한 기대를 가진 100명이 그 배를 타기 위해 줄을 섰다. 경쟁률은 10:1이다. 엘도라도로 가는 배에 타지 않는다고 죽는 것은 아니다. 단지 황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기대 이익을 포기할 뿐이다. 10명이 배에 타기를 포기했다. 경쟁률은 9:1이 된다. 이번에 추가로 40명이 다른 길을 가기 위해 항구를 떠났다. 경쟁률은 다시 5:1로 떨어진다.
우리는 지금까지 오직 이익의 관점에서 경쟁에 참가한 사람들이 황금을 얼마나 차지하는지는 계량해 왔지만, 이익에서 밀리거나 물러난 백수들로 인해 경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어떤 심리적 이익을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만약 대한민국의 모든 고3이 서울대에 입학할 수 있는 절대적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치자. 지금도 지옥'같은' 입시 경쟁은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가 되지 않겠는가? 백수들은 이익 투쟁에 빠져 있는 무한 경쟁에 비껴 나며 지금까지 계량화할 수 없는 가치로 인류의 생존을 거들어 왔는지도 모른다.
백수는 이익 투쟁에 참여하지 않는다.
단지 인류의 생존을 거들어 왔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