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yka의 <필터 월드>를 읽기 전에...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인간만이 꿈을 꿀 수 있다고 주장했고,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인간이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라고 믿었다. 칸트(Immanuel Kant)는 자율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강조했으며, 마르크스(Karl Marx)는 노동이야말로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강변했다.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인간의 초인적 의지를, 아렌트(Hannah Arendt)는 행동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프롬(Erich Fromm)은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생각했다.
모두 한 시대를 풍미했으며, 여전히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대단한 사상가들이 한 훌륭한 말씀들이라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그보다 훨씬 이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이성적 동물(Zoon Logon Echon)이자 사회적 동물(Zoon Politikon)로 정의하고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며 공동체를 지향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인간이 과연 그런 존재일까? 하는 의심이 든다. 한번 위에 언급했던 사상가들의 다양한 주장을 감히 도장을 깨듯 하나하나 반박해 보겠다. 프로이트가 말한 꿈은 이성의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는 무의식을 상징한다. 즉, 프로이트는 꿈을 꿀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이성의 위대함에 몰두하던 시대, 꿈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이성에 의해 억눌려 있는 무의식의 세계, 즉 동물적 본성을 가진 인간의 이면을 들춰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루소의 "도덕", 칸드의 "자율", 니체의 "초인"은 모두 "is"가 아닌 "should be"의 의미로, "그렇다"가 아니라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그래야 한다"의 의미가 더 강하다. 이는 마치 공자가 志學, 而立, 不惑, 知天命, 耳順, 從心이라는 말을 했던 의도와 다르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공자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도 그 나이가 되면 저절로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공자가 아니다. 공자님의 말씀이 유명한 것은 범인(凡人)들은 그렇게 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공자님의 말씀을 성찰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志學: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세우지 않으면 평생이 괴로울 수 있으니 싫더라도 공부를 해야 한다.
而立: 늦어도 서른이 되면 뜻을 확고하게 세워야 한다.
不惑: 마흔은 가장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나이니 미혹되지 말도록 유의해야 한다.
知天命: 오십이 되었다고 하늘의 뜻을 안다고 깝치지 말아야 한다.
耳順: 육십은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어려운 나이니 귀를 순하게 해야 한다.
從心: 칠십이 돼서까지 마음대로 행동하면 말년에 인생 잦된다.
출처: 나이에 대한 오해와 진실(https://brunch.co.kr/@back2analog/236)
노동을 강조했던 마르크스와 행동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주목했던 아렌트도 결은 다소 다르지만, 인간의 객관적 특징과 무관하게 자신의 신념을 인간의 특징에 투영하려고 했던 측면이 강해 보인다. 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프롬의 주장에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관계"라는 단어에 주목해 인간의 특징을 이해하려 한다.
인류의 현 조상인 사피엔스가 20만 년 전에 지구에 등장하여 짧은 시간 안에 지구 생태계의 꼭대기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는 인간 특유의 관계 능력 때문이다. 보잘것없는 크기에 날카로운 발톱도 장착하지 않은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자신보다 몸집도 크고, 힘도 세고,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진 동물들을 상대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집단을 이루어 살아갈 수 있는 관계 능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인간이 진화 과정에서 분절적 언어를 사용하게 된 것은 생존을 위해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한다는 필연이 우연이라는 진화 과정을 만난 결과이지, 아무 맥락 없이 언어를 사용하게 되어 관계 능력을 키워 온 것이 아니다. 그렇게 관계 능력을 중심으로 진화해 온 인간이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역사발전의 단계를 거치며 성장해 왔는데, 자본주의 시대에 이르러 인간의 모든 관계는 자본에 의해 상품화되고, 소비로 대체되어 자본주의라는 경제 토대 위에서 오로지 경쟁을 통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완벽한 상부구조를 완성하게 되었다.
출처: 종교의 신념화와 신념의 종교화(https://brunch.co.kr/@back2analog/2)
즉, 인간의 그저 "다양한 부족함이 관계를 통해 생존해 왔던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다 우연한 기회에 생존하기 위해 서로 의지해야 하는 "관계"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인류는 현재 그렇게 폭력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인간에겐 "관계"의 발견이 천운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구 생태계 입장에선 지속가능한 "재앙"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에 드디어 인간이 대형 사고를 치게 된다. 신이 자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든 것처럼, 인간 또한 자신을 복재한 인공지능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제 본론을 시작해야 하는데... 서론 쓰느라 진을 다 빼 버렸다. ㅠㅠ 아무튼 우연한 기회에 "카일 차이카(Kyle Chayka)가 쓴 <필터 월드>라는 책의 소개글을 읽고, 불현듯 인간을 능가하고 있는 인공지능보다, 인공지능화 되어 가고 있는 인간이 더 걱정이라는 생각이 들어 급하게 글을 써 보았다.
어쨌든 이 글을 써 내려가며 내가 고민해야 할 대강의 방향과 갈피는 잡은 것 같다. 다음에는 "인공지능화되어 가고 있는 인간"이라는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 생각을 이어가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