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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지오 아파쇼나타

by 이종민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낚싯배의 추억이 먼저고, 두번째가 작은아들이 머리에 빨간 물을 들인 일이며, 영화를 본 것은 최근이다. 그때 내 나이가 스물둘이었으며, 아들이 지금 스물둘이니, 나의 추상(追想)은 인생의 절반 정도 기간을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삶의 근거에 대한 하릴없는 유추라고나 할까?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인상이 깊었던 것은 좀체 일어날 수 없는 기묘한 스토리 때문이 아니라, 망망대해의 조각배에 몸을 실은 맹수와 인간의 고독한 대처 때문이었다. 삶은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관념만으로 강요될 수 없는, 오로지 실존으로 소중한 것이므로 언제라도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호랑이 ‘리처드 파커’의 공포와 공존해야 하는 어린 소년 ‘파이’의 삶을 향한 느린 모색이 나이든 나에게 얄밉도록 아름다웠다는 이야기이다.

‘아다지오 아파쇼나타’. 속도와 태도를 정의하는 이 음악 용어가 영화를 보는 내내 맴돌았다. 느리지만 열정적으로......

도회에서 공부하다 고향으로 내려간 대학 삼 학년의 여름방학이었나 보다. 간간이 일어나는 작은 낚싯배의 요동은 아버지가 물고기를 챔질하는 순간이었으므로, 그때마다 나는 망망한 바다 위에서의 아버지의 존재를 잠시잠시 확인하곤 하였다. 이따금 해풍을 타고 아버지의 담배 연기가 내 코로 스며들었다. 여름 바다 위에서 결핍의 본능과 싸운 조급한 나의 네 시간은 느긋한 아버지의 시간에 비하여 얼마나 긴 것이었을까? 그때, 아버지가 슬쩍 돌아앉았다. “너도 한 대 피우거라.” 머뭇거리며 내가 돌아앉았으므로, 이번에 나의 담배 연기가 아버지의 코로 스몄을 것이다.

배의 이물과 고물에서 등을 마주하고 앉은 부자(父子)의 풍경이 한 점의 풍경이 되어 내 기억에 아로새겨졌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아버지의 다른 한 손에 쥐어진 노(櫓)가 조류의 빠른 흐름을 쉼 없이 가르고 있었음은 알지 못하였다. 열정은 젊은 나만의 것인 줄로만 알던 때였다.


서울로 간 아들의 일상에 대한 궁금증을 저의 <페이스북>을 통하여나마 풀어보려던 기대는 아들과 아들의 친구들이 지면에 등장하는 나의 존재를 버거워하고 부터 여의치 않았다. 나의 일방적 소통이 간섭이라 여겨졌을까? ‘친구끊기’를 할까 망설이던 어느 날, 우연히 발견된 아들의 사진 하나는 그러던 내 머리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온통 붉은색으로 머리 염색을 한 아이의 모습은 영락없이 네덜란드의 훌리건 이거나 야밤 폭주족의 모습과 다름없었다,

“이제 염색물이 많이 빠졌을 거예요.” 입대를 위하여 휴학하고 내려오는 아들을 맞아야 하는 역대합실에서 그 동안의 불평에 긴장했던 아내가 내 눈치를 살핀다. 그러나 아들이 내 차에 오르는 순간까지 “잘 있었나?” “예.” 이 두 마디의 대화만 있었을 뿐, 더 이상의 실랑이는 없었다. 아내의 위안대로 날이 지나자 염색의 농도가 점점 엷어졌고, 이후로 머리로 인한 시비가 더는 없었다.


무엇이 나의 감정을 다독였을까? “요즘의 아이들이 다 그렇소. 염색한 머리가 선배의 머리는 아니잖소. 제발 아이들 좀 내버려두소.” 며칠 전 술자리에서 시니컬한 성격의 후배가 내게 건넨 충고의 영향이라기보다는, 고물에 돌아앉아 내게 담배를 피우게 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문득 떠올린 이유가 더 클 것이다. 뱃전에서의 그 날, 어색했던 내가 아버지의 관용을 미처 이해하지 못하였듯이, 지금의 아들 또한 겨우 스물두 살의 나이를 지나는 중이 아닌가?

파자 조각을 집어든 아들의 손등 위로 나의 눈이 머물렀다. 작고 흰 손에 엷은 핏줄이 선명하다. 뜬금없이 저의 소매를 걷어 올리는 나의 동작에 설핏 놀란다. 화장실에 간 틈을 타서 아내에게 말했다. “한약이라도 한 재 지어 먹이지? 저 손으로 총이라도 잡겠나?” 아내가 포크를 놓는다. 화장실 쪽에서 아이가 털레털레 걸어온다. 혼자 중얼거렸다. “세상은 격랑의 파도 속이거늘......”


삶의 장면들과 다름없이 영화는 빠르고 분망하였다. 호랑이와 소년이 투쟁을 펼치면서 이물과 고물로 대치된 배 안의 풍경은 ‘프레스토’의 리듬으로 현란하게 몰아치며 보는 이의 숨을 죽이게 하였다. 어디 배 위만 그랬을까? 주위 또한 격랑의 파도였고, 난데없이 먹구름이 밀려오기도 하는 빠른 장면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생존을 전제로 한 소년의 선전은 느리지만 야무졌다.

격정의 영화가 명료하게 요약되었다. 호랑이가 서서히 소년의 뜻대로 조련되어 갈 무렵, 조각배의 이물과 고물에 앉은 두 존재가 비로소 눈을 맞추기 시작하였다. 소년에게는 세상을 다 산 듯 오랜 시간이었을 것이다. 평온이 찾아온 바다에서 마침내 호랑이를 의식하지 않고 하늘의 별을 바라본 소년. 삶이란 그러한 느린 ‘아다지오’의 결과이기도 함을 격정의 소년이 미처 알았을까?


생각한다. 뭇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또한, 스스로의 의지로 내리지 못하는 망망대해에 뜬 조각배의 안과 같은 것이 아닐까? 세상살이가 결국 느린 ‘아다지오’의 결과일 것임을 격정의 자식이 이해하지 못하듯, 아비의 섣부른 간섭 또한 나이든 자의 성급한 결론이 아닐는지? 생각해 보면, 아들과 나 사이의 연주 또한 늘 ‘프레스토’ 리듬의 연속이었다. 기대와 원망, 채근과 반항....... 그러나 우리 둘 사이의 완주 또한 느리고 길게 진행됨을 저나 나나 어쩌겠는가.


아들아! 느리고 보수적인 아비의 리듬은 여전히 격정의 너에게 버거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삼십오 년 전 내 아버지의 관용을 본 따, 천천히 세밀하게 ‘아다지오’의 삶을 네게 가르치려 하는 것이다. 너의 ‘아파쇼나타’를 기꺼이 이해해 가면서..... ‘아다지오 아파쇼나타’. 이 말, 잊지 말거라. 찬찬히, 그러나 열정적으로.......

덧붙인다. 세월의 힘을 빌려 느긋해진 나의 추상(追想)이란 결국 이런 것임을 이해하여라. 그때로 돌아가 아버지와 내가 다시 조각배 위에 선다면? 이번엔 아버지를 이물이 앉히고, 내가 고물에 돌아 앉아 노를 저을 것이다. 그리고 춘풍을 타고 서서히 봄 바다로 스미는 아버지의 담배 연기를 기꺼이 맡으련다.




* 아다지오 / 음악용어. 느리게 연주하라는 뜻

* 아파쇼나타 / 음악용어. 열정적으로 연주하라는 뜻

* 프레스토 / 음악용어. 매우 빠르게 연주하라는 뜻

* 친구끊기 / SNS에서의 대화단절 방식을 말하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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