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리는MK Oct 12. 2021

마른 햇빛 냄새 체육복



 


"야. 비상이다. 비상."


김우리가 짖궂게 말하며 코 아래 검지손가락을 댔다. 손가락을 우스꽝스럽게 흔들며 비상! 하고 외쳤다. 그러면 주변 친구들이 꺄르르 웃으며 함께 비상! 비상! 하고 외쳤다. 이것은 김우리가 그 애를 놀리는 방식이었다. 비상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기억 나지 않는다. 김지은이었던 것도 같고 김지영이었던 것도 같다. 아무튼 나처럼 평범하고 흔한 이름을 가진 아이였다. 그 애는 은따였는데, 이유는 머리를 잘 감지 않아서였다. 그 애가 근처에 오면 지독한 냄새가 나는 비상사태가 벌어진다고 해서 별명이 비상이었다. 나는 김우리와 함께 밥을 먹는 무리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어쩌다보니 점심을 먹을 때마다 비상을 은따로 만드는 가담자가 되었다. 아이들이 비상을 씹을 때도, 이상한 수신호를 할 때도, 쓰레기통 쪽으로 그 애의 가방을 은근히 밀어버릴 때도 나는 그 옆에 있었다. 그때마다 그저 쳐다보기만 했다.



하루는 체육시간이었다. 수행평가 순서를 기다리느라 삼삼오오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나와 밥을 먹던 무리들은 수행평가를 치루느라 저 쪽에 가 있었다. 할 일이 없어 그저 앉아 있었는데, 문득 옆을 돌아보니 비상이 있었다. 비상은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그 책 제목이 궁금했다. 곁눈으로 계속 책을 흘끗 거리다가, 비상이 책을 덮는 순간 제목을 보고야 말았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것은 우리 집에도 있는 책이었다.






그 날 이후, 비상은 내가 혼자 있을 때 종종 말을 걸어왔다. 반 아이들이 그 장면을 목격하기라도 하는 날엔 시끄러워질 것이 뻔해서, 비상과 함께 있을 땐 줄곧 적군과 내통하는 스파이처럼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리고 기피하듯이 대화를 끊고 먼저 가버리곤 했다. 나는 그 짧은 대화를 통해서 비상이 살고 있는 곳을 알게 되었다. 그 애가 사는 곳은 우리 집 바로 건너편, 단수가 자주 된다는 지하 단칸방이었다. 그래서 머리를 자주 감지 못했다는 것과 고물을 줏어오는 아버지 덕분에 헌 책이 아주 많아 책을 자주 읽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비상과 친구가 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비상과 함께 하교할 수 없었다. 책에 대해 이야기 할 수도 없었다. 나에겐 함께 도시락을 먹고 밝은 곳에서 이야기 나눌 사람이 필요했다. 그때는 그런 것이 친구의 기준이었다.


학기가 지나고 학년이 올라갔다. 비상과 나는 다른 반이 되었고, 김우리도 다른 반이 되었다. 그래도 비상은 여전히 머리를 감지 않는 아이였고, 나는 여전히 점심 도시락을 함께 먹는 무리 중 하나가 되기 위해 애쓰는 아이였다. 김우리도 여전히 밝고 명랑하게 은따를 만들어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었다면, 나는 가끔 비상에게 체육복을 빌려 입었다는 것이다. 일부러 쉬는 시간이 다 끝나갈 무렵, 아무도 모르게 그 애에게 체육복을 빌리러 갔다. 불쑥 찾아가 쭈뼛거리며 옷을 빌리는 나에게, 비상은 반듯하게 잘 캐긴 옷을 내밀었다.



비상의 체육복에서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뽀송하게 마른 햇빛 냄새가 희미하게 나는 것도 같았다. 나는 그 체육복을 돌려주면서 그 애에게 고맙다고 말하지 못했다. 매번 '미안해' 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리고 비상은 그런 나에게 '아니야, 고마워.' 라고 말했다.


비상은 왜 나에게 고맙다고 했는지, 그리고 나는 왜 매번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끝끝내 고맙다고 할 수 없었는지 그 때는 알 수 없었다.


이름조차 기억 안 나는 그 애에게 지금에라도 말하고 싶다. 체육복 빌려줘서 고마웠다고.


정말 고마웠다고.





작가의 이전글 위로 받을 땐 캔디처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