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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는MK Apr 08. 2023

그 정도 결제는 할 수 있어

돈으로부터의 독립 



4월 초에 안마의자를 샀다.


기종을 고르느라 심각하게 화면을 보고 있는 내 머리 위로 기생충의 최우식이 슬그머니 튀어나와 중얼거렸다. '이야. 이거 되게 상징적인데?' 



그렇다. 안마의자를 산다는 것은 내게 무척이나 상징적인 일이었다. 인생에 있어서 어느 정도 성공하고 안정궤도에 접어들어야 비로소 할 수 있는 소비라고 생각해왔다. 성공한 자가 누릴 수 있는 효도처럼 느껴졌달까.  3월에 강의 하나가 들어왔고, 계약금을 받고 나서 절반은 빚을 갚았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저금을 해야 마땅한 일인데, 어쩐 일인지 나는 안마의자 결제창 앞에서 다 죽어가는 소처럼 우거지상을 쓰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뭔가 좀 이상했다.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싶다고 늘 습관처럼 생각 해왔는데, 대체 어떤 기준이어야 경제적으로 독립했다고 나 스스로 인정할 수 있을까? 이미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산지는 꽤 오래되었다. 그런데도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는 '독립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출가'라는 단어도 쓰기가 참 애매하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언니의 명의로, 대출금과 공과금을 언니가 감당하고 있다. 한 마디로 실질적인 가장은 언니인 셈이다. '부모님과 내가 언니에게 빌붙어 살고 있다'가 정확한 표현인 셈이다. 부모님에게 돈 빌린 적 없고, 금융권에 빌린 돈은 착실히 갚고 있으며, 빠듯한 월급이지만 밥벌이를 하고 있다. 약 4년 동안 작업공간을 따로 꾸려서 보증금 내고 월세 내며 살았던 적도 있다. 잠만 집에서 잤을 뿐, 그 모든 경제적인 문제를 내가 스스로 해결하고 있는데도 왜 나는 내가 독립하지 못했다고 생각했을까. 이번에 안마의자를 집 안에 들이면서 그 이상하고 기묘했던 기분의 정체를 알아챘다.




부모는 아이가 접하는 최초의 성인이다. 아이는 성격과 인성, 습관 등 모든 면에서 부모를 모방하면서 자아를 형성한다. 돈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부모가 돈에 대해 갖는 태도가 은연중에 자식에게 영향을 준다. 


-머니패턴 중에서-



아빠는 내가 안마의자를 산다고 했을 때부터 마뜩찮아 하면서 계속 핀잔을 늘어놓았다. '70만원이나 한다고? 아이고, 그렇게 큰 돈을. 어쩌다 돈이 생기면 그렇게 펑펑 써버리기나 하고' 그리고 그 말을 하는 아빠가 본인의 인생이 그러했음을 알고 계시는 것인지 모르겠다. 천만원이 넘는 열가마를 말도 없이 덥썩 사고, 자신의 아이템으로 사업을 하겠다며 몇 억이나 하는 창업대출을 불쑥 받았던, 그런 아빠의 인생. 그리고 그런 아빠의 딸은 어느 날 갑자기 안마의자를 사주겠다 했으니, 이런 걸 사자성어로 '피장파장' 이라고 했던가. 아빠가 한 번 이렇게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절대로 안 쓴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이것 외에도 내가 효도한답시고 하는 행동을 아빠는 기뻐하며 받아들인 적이 없었는데, 그것은 할머니와 아빠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는 아빠가 뭘 사오거나 돈을 주면 '넌 돈도 없는데 뭘 이런 걸' 이라고 수식어처럼 늘 붙여 말하고 혀를 차셨다. 슬프지만 우리의 역사는 그랬다. 할머니가 왜 혀를 차고, 아빠가 왜 내 선물은 마뜩찮아 했는지 이제는 안다. 혀에 가시가 돋쳐 표현이 거칠고 나쁜 사람들은 고맙게 받는 법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 혀가 거친 사람들은 본인 스스로에게 철저히 인색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아빠에게 말했다. '이 정도 살 돈은 돼. 아빠 나 그 정도는 벌어.' 그리고 그 말 역시 아빠가 할머니에게 자주하던 말이라는 것을, 뒤늦게 떠올리고 이마를 탁 쳤다. 아아. 제발. 부디 이런건 대물림 하지 말아주세요....


어쨌든 내가 생각하는 경제적인 독립은, '철저히 나를 위해서 쓰는 돈'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나 혼자 먹고 살아도 충분히 괜찮은 넉넉한 돈'도 아니고, '나 쓰고도 남는 돈으로 가족에게 안마의자를 사줄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 건 이제 로또 당첨만큼이나 판타지에 가까운 생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저 내가 내 돈을 운용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돈에 있어서 비굴한 마음이 들지 않고, 건강한 마음으로 벌어들이고 쓰고 싶다. 돈을 쓴다 해도 '이렇게 펑펑 써버리기나 하고' 히면서 겁에 질려하거나 어두운 마음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들게 돈을 쓰고 기뻐하고 싶다. 계획된 지출과 의외의 수입 속에서 돈과 그야말로 돈독하게 지내고 싶은 것이다. 부모로부터의 독립이나 출가보다 더 시급한 것이, 바로 돈으로부터 올곧게 독립되어 있는 내 마음인 것 같다.


결론적으로 나는 안마의자를 샀다. 상징적인 그 물건이 우리집 거실에 위풍당당하게 떡 하니 놓여있는 것이다. 새 제품 위에 앉아 버튼을 누르고, 커피도 한 잔 마셨다. 팔걸이가 없는 모델이라 손이 자유로워서 좋았다. 그러자 이번엔 기생충의 이선균이 슬그머니 나타나 한 마디 했다. '이야~ 이거 코너링이 훌륭하시네요.' 


그래, 이 좋은 걸 내가 샀단다. 아빠가 말하는 것 처럼 '돈 생기면 펑펑 써버리기나 하는' 게 아니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말했던 것 처럼 '돈도 없는데 뭐하러' 산 게 아니었다. 이걸 사면서 나는 부피만 차지하고 꼴뵈기 싫었던 아빠의 실내자전거를 드디어 치워버릴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집에 고가의 가전제품을 사다 놓을 수 있는 경제력과 그 정도 결제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주도권이 생겼다. 돈과의 관계에 있어서 내 마음이 바뀌고 달라진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안마의자는 나에게 효도와 성공의 상징이 아니라 독립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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