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으로부터의 독립
최근에 오전마다 진로특강에 다녀왔다.
처음 진로특강 제안이 들어왔을 때, 어릴 적 꿈꾸던 장면이 현실에 펼쳐졌다고 생각했다. 웹툰작가가 되어서 학교마다 작품에 대해 강의하러 다니는 모습, 성공에 대한 환상을 가지기 딱 좋은 장면 아니던가. 그렇다. 작가로서 성공하면 그렇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문제는 내가 성공한 작가도, 유명한 포털사이트의 연재 경험이 있는 웹툰 작가도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웹툰작가'라는 단어에 얼마나 많은 기대와 환상이 깃들어 있는지, 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며 피부로 체감했다. 아이들은 내가 '웹툰작가'라고 소개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듣보잡인 나에게 사인을 받아갔다. 하긴, 나 같아도 중학생 때 웹툰작가가 학교에 온다고 하면 두 눈을 빛내고 달려갔을 것이다. 졸지에 연예인을 사칭한 사람이 된 기분으로 아이들에게 인스타 주소를 적어주며 식은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왔다.
PPT를 만들면서는 '카카오 임팩트'에서 했던 만화 작업을 내세워 그 이름 뒤에 자꾸 숨으려고 했다. 초라하고 실패했던 나는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자꾸만 올라왔다. 내가 했던 만화 작업은 그것 말고도 유의미한 것들이 참 많았는데, 돈과 유명세를 떠나 의미 있는 것들이 분명 있었는데 말이다. '웹툰작가'라는 말에 반응하는 것은 아이들 뿐만 아니라 실은 나 자신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결국 아이들 앞에서 경험을 진솔하게 이야기했다. 웹툰작가가 되고 싶어서 겪었던 실패의 경험도 이야기해 주고, 청소년과 아픈 환우들과 만화로 소통했던 경험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잘난 척하고 멋있어 보이기 위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서, 그런 나 자신이 아니라서 참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기대했는데 솔직히 재미가 없었다."
"작가가 얼마 버는지 이제 알겠다."
진로특강 뒤에 아이들이 쓰는 설문지에 적힌 평가를 읽었다. 대놓고 엎드려 자는 학생들이 절반 이상인 곳도 있었다. 어떤 학생은'그리는 MK? 래퍼임?' 하며 놀리기도 했고, 어떤 학생은 노골적으로 다른 친구와 킥킥 거리며 장난을 치기 바빴다. 환상이 아닌 현실에서는 그런 모습도 분명히 있었다.
"웹툰작가의 다른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어요."
"감동적이었어요. 작가로서 사는 것에 대해 알게 됐어요."
"작가는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것 깨달았어요."
그리고, 선물처럼 이렇게 답변을 남겨주는 학생들도 분명히 있었다. 답변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비눗방울 같은 마음들이 동그랗게 퐁퐁 떠오른다. 반 아이들 중 한 사람에게라도 나의 이야기가 가 닿아 힘이 되길 바라는 마음. 창작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그 이야기로 꽃을 피우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비눗방울처럼 허무하게 사라질지 모르는 마음들이다. 하지만 순간의 감동을 주고, 기억을 아름답게 할 수 있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해도 비눗방울을 불면 행복해지는 사람들처럼, 연약하고 아름다운 마음들을 내 안에 띄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