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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민 Jan 11. 2022

여행을 따라가며 읽는 역사 인물 이야기 3화(궁예2)

세력을 급속히 뻗어나가는 궁예 이야기





▲ 죽주산성 궁예가 세달사를 나와 처음 들어간 곳은 기훤이 다스리고 있던 죽주였다. 오래지 않아 그는 기훤에게 실망하고 양길의 수하로 들어가게 된다.


안성의 동쪽에 자리한 죽산, 현재는 한갓진 마을이지만 예전엔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로 꽤나 번성했던 곳이다. 이곳을 다스리면 신라 오경중 서원경(청주), 중원경(충주), 북원경(원주)가 근접해 있고, 그곳을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이기에 야망을 품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탐낼 만하다.

이 죽산이 바라보이는 비봉산 정상부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성된 옹골찬 성벽이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곳을 다스리는 수령은 기훤이었는데 그는 목 좋은 터에 웅거 하며 많은 영웅호걸들을 모아 서원경을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풍채 좋은 궁예 일행이 기훤 밑으로 들어왔지만 그는 썩 궁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 그는 사실 사람을 이끄는 궁예를 질투하고 있던 것이다.     







▲ 영원산성 궁예가 기훤에서 벗어나 향한곳은 영원산성을 기점으로 북원을 다스리고 있던 양길이었다. 그는 그의 밑에서 본격적인 장수로 활약하게 된다


궁예도 얼마 지나지 않아 기훤의 속좁음에 실망해 비교적 큰 세력을 지닌 북원의 양길에게 귀순할 결심을 한다. 그 당시 원회, 신훤이 궁예와 함께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궁예의 리더십은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뿐만이 아니다. 궁예가 나중에 자립해 나라를 세우고 쫓겨난 뒤에도 이곳에는 일명 태평 미륵으로 불리는 매산리 석불입상을 비롯해 미륵신앙이 상당히 성행했던 동네 중 하나였다. 궁예와 인연이 있던 죽산 사람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흔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제 인원이 제법 불어난 궁예 일행을 맞아 북원의 양길은 두 손을 뻗어 그를 환영한다. 양길은 험한 요지인 치악산 중턱의 영원산성에 자리를 잡고 북원 성을 공략하던 중이었다. 후에 양길은 북원경을 비롯해 중원경 등 중부지방의 30개 성을 차지한 대 세력가로 거듭나게 된다. 궁예도 그의 수하로서 치악산 석남사 일대에 진을 치고 장군으로 큰 활약을 펼친다.     

이제 궁예는 본격적인 웅비를 펼치기 시작한다. 그는 유년기를 영월의 세달사에서 보냈기에 그쪽 지리에 훤하다는 이점을 살려 양길의 병사를 받아 독자적인 군사 활동을 하게 된다. 미륵을 기치로 내건 그의 군대는 수탈을 일삼았던 다른 부대와 달랐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사졸과 함께 고생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무사하였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미륵의 현신(現身)이었다. 궁예의 부대는 영월, 평창, 태백 등 강원도 동부일대를 점령하며 나아가 어느덧 태백산을 넘어 영주의 부석사에 이른다.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화엄종의 거점으로 삼은 화엄십찰의 하나인 부석사는 왕실의 후원을 받았고 한 전각에는 역대 신라 임금의 초상화가 걸렸다고 전해진다.

신라 왕실에 의해 버림을 받은 궁예, 백성들과 부하에게 한없이 자애로웠던 부처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야차의 화신이었다. 그의 생부 일지 모르는 헌안왕을 비롯해 모든 왕의 초상화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그는 신라를 '멸도'라 칭하며 적대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궁예가 양길에게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자립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세력을 끌어 들어야만 한다. 그곳 중 하나가 강원도 동부의 명주, 지금의 강릉이다. 이곳은 본디 태종 무열왕의 직계 후손인 김주원이 왕위 다툼에서 밀려난 이래 자리를 잡아 100년 이상 웅거하고 있었다. 현재 명주군왕이자 성주인 순식은 세력권이 속초에서 삼척까지 닿을 정도로 사실상 독립된 나라의 군주였다.  







▲ 굴산사지 현재 강릉에 위치한 굴산사지는 당시 명주의 성주인 순식의 아버지인 허월이 주석하던 큰 사찰이었다.


아무리 궁예 세력이 급속도로 커졌다고 하지만 명주군 세력에 비하면 바람 앞의 촛대일 뿐이다. 그런데 돌연 명주 땅 전체를 궁예에게 바치고 항복하고 만다.

여러 가지 추측이 있지만 당시 순식의 아버지인 허월이 불가에 귀의한 상태였고, 승려 출신인 궁예에게 나름 호감을 느꼈으리라고 본다. 순식은 땅과 지위를 그대로 보존받아 여전히 명주를 다스렸고, 궁예가 몰락하고도 10년을 버티다가 왕건에게 항복하고 성을 하사 받아 왕순식이 된다.

이제 궁예는 양길에게서 독립을 선언하고 대관령을 넘어 인제, 춘천을 거쳐 철원성을 향해 거침없이 돌진했다. 하지만 남쪽에서 올라오는 관군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몇 년간의 전투를 통해 명주에서 송악(개성)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중부 일대에 거대한 세력을 구축한다.     

그러나 그가 국가를 세우려면 비전이 필요했고, 국가를 받쳐줄 지지세력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에게는 호족들의 지지가 필요했다. 궁예의 눈길은 어느새 황해도, 개성 일대에 분포하는 패서지방의 호족들이었다. 그 호족들 중 세력이 강대했던 자들은 황주의 황보제공, 평주의 박지윤, 정주의 유천궁 그리고 왕건의 아버지인 송악의 왕륭이었다. 그들은 궁예에게 항복했고 기득권을 보장받는다.

곧이어 궁예는 송악을 수도로 삼고 왕건을 자기 수하로 삼아 중용하기로 결심한다. 한편 죽주의 기훤과 북원의 양길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때 당시 양길이 죽주에 있었던 기록으로 보아하니 이미 기훤의 세력은 궁예가 떠난 지 오래지 않아 소멸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양길은 궁예의 세력이 빠져나갔다고 해도 여전히 신라 오소경중 중원, 북원을 비롯해 여전히 20개 성이 그의 수하에 있었다. 양길과 궁예의 대결은 이제 피할 수 없었고, 예전 기훤의 터전이었던 죽주산성, 즉 비뇌성에서 899년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다.      







▲ 기솔리 석불입상 안성 죽주산성 너머 쌍미륵사에 자리잡고 있는 기솔리 석불입상은 궁예가 비뇌성전투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세운 것이라 전해진다.


이 전투에서 궁예는 승리를 거두게 되고 양길의 세력은 완전히 사라졌다. 궁예는 승리를 기념하여 죽주성에서 머지않은 장소에 미륵불 2기를 조성하니 현재 쌍미륵사의 기솔리 석불입상이라 하는 곳이다. 이제 호족들의 시대는 끝나고 후백제를 세운 견훤과 함께 양대 축을 이룬 것이다. 궁예는 901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고려라 칭하고 후삼국시대의 본격적인 막을 올렸다.          


덧붙이는 글 |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 1권 (경기별곡 1편)이 전국 온라인, 오프라인 서점에 절찬리 판매 중 입니다. 경기도 각 도시의 여행, 문화, 역사 이야기를 알차게 담았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권,3권은 2022년 3월 출판 예정입니다. 경기도는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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