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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을 보내며

작년에는 스스로가 한 게 거의 없다고 느껴져서 회고를 따로 쓰지 않았는데 올해는 다른 분들이 스스로에게 있었던 일들을 정리해두신 것들이 보기 좋아서 한 번 적어보기로 했다. 올해에 있었던 일들.



내 경력 중에 가장 오래 다녔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6년 경력 중에 3년 반 동안 재직했던 카카오를 그만두고 다른 회사로 이직했다. 2018년이 되면서 받은 연차 휴가와 3년 재직 후 주어지는 1개월간의 리프레시 휴가를 통해 새로운 회사에 취직하기 전에 2개월 가까이 쉬며 재충전의 시간을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그 긴 시간 동안 생산적인 일을 별로 하지 않은 것이 조금 안타깝기도 하지만, 이제 내가 여유가 주어진다고 해서 코딩을 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차차 인정해가고 있는 것 같다.


회사를 떠나는 마음은 시원 착잡했다. 4년 다닌 대학교를 떠날 때도 싱숭생숭했었는데 거의 비슷한 시간 동안 매일매일 빠지지 않고 회사에 갔으니 아마 훨씬 더 긴 시간을 회사와 함께 했을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생활의 대부분이 회사에 맞춰져 있었다. 퇴사 후 한두 번 정도 사람들을 보기 위해 갔었는데 고향에 온 기분이더라. 너무나 익숙한 공간에 있는데 나는 더 이상 이 회사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의 그 이상한 기분이란.



30년간 살았던 한국을 떠나 캐나다에서 살기로 결정했다


교환학생이나 여행 등으로 몇 달간 외국에서 지냈던 경험은 있지만 해외에서 나가서 살기로 한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나와 함께 회사를 그만두고 같이 떠나야 할 와이프가 있어서 더더욱 더 그랬고. 


"왜 외국에 나가서 살기로 결정했나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물론 더 큰 회사에서 다양한 경험들을 해보고 싶은 커리어 상의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우리 부부 모두 언젠가 한 번은 해외에서 살아보는 경험을 해 보고 싶었다는 이유도 있다. 캐나다 생활은 어떤가 묻는다면 할 말이 엄청 길어지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이 블로그에서 시간을 가지고 차차 하는 수밖에 없을 듯. 아직 온 지 일 년도 안됐기도 하고.



여름이가 태어나서 아빠가 되었다


아마 지금까지의 인생 중에서 가장 크고 드라마틱한 변화가 아닐까? 다른 자잘한 변화들이 운전을 하면서 약간씩 핸들을 트는 것과 비슷했다면 부모가 된 것은 유턴에 가까운 큰 변화였다. 영어로 하면 ground-braking change, 그러니까 여태 내가 발을 딛고 실던 땅바닥이 박살 나는 것 같은 천지개벽이었다. 


아빠가 되는 것에 대해서 깊게 고민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와이프와 내가 만나서 결혼하고 같이 살기로 한 것은 동등한 성인으로서의 관계이지만 내가 인생을 전적으로 책임져야 할 누군가가 생긴다고 생각하면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고서 그런 생각들은 완전히 변했다. 나는 아이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어서 여름이가 와이프 뱃속에 있을 때도 그냥 신기했고 지나가는 아이들을 봐도 내 아이니까 예쁘겠지, 정도로만 가볍게 생각했었는데 막상 태어난 여름이를 보니 세상에 이런 예쁜 존재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흔히들 애를 낳아보지 않으면 부모 마음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한다. 나는 이제 그 말을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 있다. 아마 여름이를 갖기로 결정하지 않았더라면 부모의 마음을 평생 모르고 살았을 것 같다. 좀 뻔한 표현이지만 여름이가 태어나고 또 우리와 함께하는 순간순간이 너무 고귀한 경험이었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유일한 단점은 육아 자체가 너무 힘들다는 것. 배 아파가며 여름이를 낳은 와이프는 말할 것도 없고, 아빠로서도 낯선 타향에서 두 사람만의 힘으로 육아와 가사를 병행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순간들이 많았다. 아이를 키우는 데에는 마을 하나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옛 말에 너무나도 절실하게 공감했다.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그 무엇보다 행복하면서도, 아이를 낳지 않고 살기로 결정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한국에 있었더라면 조리원 시스템이나 부모님들에게 도움을 얻을 수 있었을 테고 우리에겐 그게 너무도 필요했지만, 우리가 선택한 길이니 뭐 별 수 없는 거겠지.



커리어적으로는 아직 아쉽다


최근 몇 년간 가장 '핫한' 회사 중에 하나로 이직했고, 아마존의 HR 개발팀에 합류하면서 다른 회사에서 쉽게 보지 못할 만한 것들을 많이 보고 배웠다. 특히 올해에는 몇 년간 업데이트되지 않고 있었던 몇몇 분야에 대한 지식을 얻었지만 아직까지는 완벽하게 만족스럽지는 않다. 세계 곳곳에 퍼져있는 56만 명의 직원들을 관리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간단하진 않고 아직 더 배울 것들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내가 이 포지션에서 일을 계속하면서 무엇을 얻었고 얻을 수 있는지, 그것들이 내 커리어 패스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고민해 보면 내가 여기서 더 노력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 지에 대한 의문은 계속되고 있다. 내년에는 조금 더 나에게 없는 스킬을 배우는 것보다 내가 원래 가지고 있는 스킬을 더 활용하고 갈고닦을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회사원으로서의 한계를 느꼈다


캐나다로 오면서 연봉이 많이 올랐고, 지금 우리 세 가족이 생활하는 데에 부족함이 있지는 않지만 매달 회사에서 나오는 돈을 받아서 생활하는 일에 대한 근본적인 한계를 느꼈다고 할까. 비슷한 생각은 계속해 왔지만 이 사실을 보다 본격적으로 깨닫게 된 계기는 엠제이 드마코의 언스크립티드(Unscripted)를 읽고 나서. 


"세상에는 여전히 노예제도가 존재한다. 오늘날의 노예제도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을 '각본(script)'라고 부를 수 있다는 점이다. 철창을 대신하여 자발적 채무와 평생의 노역이 우리를 가두는 암묵적인 사회적 계약으로, 주 5일의 근로로 그 값이 치러지고, 인생이 황혼으로 스러져가기 시작할 때에야 자유가 주어지는 보이지 않는 각본이다."


이 저자의 전작인 부의 추월차선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다들 안정적이고 꾸준한 수입의 장점을 찬양하고 거기에서 남는 여유 자금으로 '재테크'라는 것을 하면 언젠가 일을 하지 않아도 삶을 꾸려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지만 일반적인 투자 수단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률에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고, 남들과 비슷한 방법으로 투자해서는 남들과 비슷한 결과밖에 얻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결국 회사에 다니면서 월급을 모아서 여유자금을 만드는 방법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50대 혹은 60대 전에는 은퇴할 수 없다는 것. 결국 누군가에 게, 어떤 회사에 속박되어있는 상태에서 벗어나 자기 사업을 하지 않고는 돈을 벌 수 없다는 이야기다. 말은 쉽지만 그게 누구나에게 가능한 것이었다면 사업해서 망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이를 한두 살 먹어가다 보니 이제 비슷비슷했던 주변 사람들 중에 하나둘씩 나름대로의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결국은 남들은 하지 않는 일들을 시도하고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힘들게 갔던 사람들이다. 같은 방법을 계속 시도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비정상의 증거라는 말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남들과 비슷한 길을 깔아 가면서 뭔가 다른 것을 기대했던 내가 약간은 어리석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한들 남들이 만들어놓은 회사에 다니면서도 아주 훌륭하지 않았던 내가 혼자만의 힘으로 의미 있는 뭔가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자기 회의와 나는 어떤 일을 해야 그렇게 100퍼센트의 열정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아직 내 발목을 잡고 있어서 뭔가를 당장 시도할 것 같진 않다.


사실 뭘 할지 정하는 것보다 뭐라도 해보는 게 먼저일지도...



올해의 something


올해의 책 : 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내가 그동안 고민해왔던 사회 전반적인 극우화, AI 혁명, 테러리즘 등의 사회적 현상에 대해 잘 정리된 관점을 제공해주어서 읽는 동안 눈이 번쩍번쩍 뜨였던 책. 하지만 부끄럽게도 아직 다 읽지는 못했다고 한다.


올해의 게임 : 레드 데드 리뎀션 2

나는 항상 이런 종류의 비장미 넘치는 - 주인공이 피할 수 없는 파멸을 향해 달려가면서 발버둥 치는 - 작품을 좋아하는데 이 작품 역시 정말 내 취향이었다. 처음에는 아이템 하나하나 만들면서 5초씩 기다리면서 이게 대체 뭔가 싶었는데 적응이 되니 더 몰입감에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1편도 플레이해보고 싶다.


올해의 카페 : 집 앞에 있는 빵집 스몰 빅토리

밴쿠버에 와서 인생 커피와 크루아상을 만났다. 하리오 V60으로 내려주는 풍미 좋은 커피와 한 입 베어 물면 바사삭 부서지는 크루아상은 주말 아침마다 생각나는 중독성 있는 브런치. 나랑 와이프랑 여기서 한 달에 100불 가까이 쓰는 듯.


올해의 지름 : Epson Home Cinema 1060 프로젝터

월세 사는 입장에서 벽에 구멍을 뚫고 벽걸이 TV를 달기는 부담되고 그렇다고 스탠드를 놓기엔 곧 여기저기 흔들고 다닐 여름이가 걱정되고 해서 처음으로 구매해본 프로젝터. 애플 TV와 연결해서 컴퓨터에 받아놓은 영화를 보기도 하고 넷플릭스 앱도 자주 사용한다. 500불 남짓 줬는데 이 가격에 이런 큰 화면을 얻을 수 있다는 게 감지덕지.


올해의 TV 프로그램 : 백종원의 골목식당

백종원의 프로페셔널한 자세와 날카로운 조언들은 항상 나로 하여금 "프로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고, 자기반성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내가 요리를 좋아해서 더 재미있게 보기도 했고, 뭔가를 배워야 한다면 백종원같은 스승에게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게 식당 이야기인가요 아니면 내 회사생활 이야긴가요.



2019년의 소망


내가 어떤 목표를 세우고 나서 잘 지킨 적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새해의 목표를 세우고, 그걸 또 못 지키고, 스스로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기에 새해의 목표보다는 소원을 적어본다.


내가 조금 더 의미 있게 느끼는 일을 찾아서 헌신하고 싶다.

여름이가 커 가는 과정을 옆에서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더 많이 보내고 싶다.

음주와 육아로 현저하게 저하된 체력을 회복하고 싶다.

내년 이맘때쯤에는 지난 1년에 대해 뿌듯한 감정을 느껴보고 싶다. 일이든 가정이든 운동이든.


그리고 한 가지 결심한 게 있다면,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잣대로 스스로를 평가하고 싶지 않다는 것. 나는 근본적으로 남들의 눈치를 엄청 보는 사람이라 다른 사람들에게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왔다는 사람이라는 걸 요새 문득 깨달았다. 이제 그런 건 그만하고, 남들과 나 자신을 자꾸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않고 나 스스로의 관점으로 나의 인생을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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