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캐나다에 와서 신생아가 되었다

캐나다에 가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면 주변 사람들이 제일 많이 했던 말. "와 영어 잘하시나 봐요!"


사람 마음이 묘한 게, 스스로는 그다지 아니라고 생각해도 주변에서 자꾸 그렇게 이야기하면 나도 모르게 근원을 알 수 없는 근자감이 붙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내 영어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인생에 해롭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영어를 어디서 처음 배웠냐고 물어보면 나는 항상 초등학교 시절 학원에서 만난 영어 선생님을 떠올린다. 내가 이 정도 영어 실력을 갖게 된 건 80% 정도는 그 선생님 덕분이라고 생각하니까. 어찌 됐거나 그 선생님에게서 영어를 제대로 배운 덕분에 나는 살면서 영어성적 때문에 크게 어려움을 겪은 일은 없었다. 대학 시절에는 너무 재미있게 보고 있던 빅뱅이론 한글 자막이 너무 안 나와서 직접 만들기도 했다. 해외여행을 가도 영어로 의사소통하는데에 큰 지장은 없었다. 영어로 인터뷰도 보고 오퍼도 받았다. 그래. 이 정도면 잘하는 거지, 가서도 잘할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캐나다로 왔는데,


출근 첫날 그 자신감은 완전히 박살 났다.


한국에서 가르치는 영어는 철저히 표준 발음의 아메리칸 잉글리시다. 하지만 세상에는 몇 가지 종류의 영어 발음이 있을까? 나는 세는 것을 포기했다. 구글에 검색해보면 세상에는 15억 명의 영어 구사자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의 인구는 3억 명 정도 되니 한국에서 영어를 아무리 잘 배워봤자 20% 정도의 영어밖에 구사할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듣기에 있어서는 그렇다.


'캐나다'라고 하면 백인들의 나라일 것 같다. 하지만 캐나다는 전 세계 나라 중 이민자들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나라 중에 하나고, 우리 팀도 예외는 아니어서 내가 조인할 당시에는 이스라엘, 콜롬비아, 리투아니아, 인도, 중국, 말레이시아, 캐나다, 이렇게 여섯 개의 국적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발음은 다 달랐다. 솔직히 입사하고 한 달 동안은 얘네가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더 환장할 것 같은 건 나와 인도 동료, 그리고 리투아니아 동료, 캐나다 동료 넷이서 이야기를 할 때였다. 대략 이런 상황이다.


- 그들은 내가 말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 있다

- 캐나다 동료는 모든 사람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 나는 인도 동료와 리투아니아 동료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상황이니 여러 명이 모여서 대화를 할 때 당연히 대화의 흐름을 따라기 힘들어서 맥락에 의존하게 된다. 골치 아플 때는 내가 말을 잘 못 알아듣는 친구가 나에게 뭔가를 물어볼 때다. 두세 번 정도 "sorry?"를 반복하고 나면 대충 뭘 물어보는지 알 수 있지만 그 민망함은 어쩔 것인가. (다행히 이제는 약간 고급 스킬이 생겼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음 "what do you mean?"이라고 물어봐서 "너의 말은 들었지만 어떤 맥락에서 한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다"의 상황으로 슬쩍 바꿔놓으면 물어보는 사람은 본인의 질문을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하게 되고 나는 뭔 소린지 알아들을 수 있는 시간을 조금 벌게 된다.) 어쨌든...


문화 차이 역시 만만치 않았다. 한국에선 전세 계약하기 전에 집 등기부등본도 찾아보고 연말정산의 복잡한 세금 계산이 어떻게 되는지도 완벽히 알고 있던 나였지만, 캐나다의 해괴한 은행 시스템과 한국과는 너무 다른 사회 체계에 혼란스러워하고 삽질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아니 대체 왜 21세기에 보험금 청구를 우편으로 받는 건데?) 한국어로는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영어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옆 자리 친구가 A란 말을 했는데 이럴 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할 말이 떠오르면 이미 대답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후다.


살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을 때 가장 안전한 선택지는 뭘까? 다른 사람들을 따라가는 것이다. 남들이 가면 가고, 먹으면 먹고, 웃으면 웃고, 남들이 하는 행동을 따라 하고 말을 따라 하고 선택을 따라 하고. 그런 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스스로가 아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갓 세상에 태어난 아기는 아무것도 모른다. 밥을 먹는 방법도 옷을 입는 방법도 말하는 방법도. 그저 어른들이 하는 걸 지켜보고 따라 하고 어느 순간 배우게 될 뿐이다. 


캐나다라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나는 신생아가 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