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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에 없는 것들

저렴하고 친절한 병원, 가성비 좋은 식당, 빠른 택배

한국은 지구온난화로 인한 전례 없는 폭염으로 다들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이 지인들의 SNS 계정을 통해 전해져 온다. 밴쿠버가 자리 잡고 있는 BC주 역시 예외는 아니라서 올해는 무려 폭염 경보가 내려졌다.


흔한_밴쿠버의_폭염.jpg


물론 그 폭염이라는 게 30도 초반. 불볕더위에 익숙한 한국 사람들이 보면 헛웃음이 나올 일이다. 밴쿠버는 태평양에 접해있어서인지 사계절 기온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다. 여름에는 30도를 넘어가면 매우 더운 날씨고 겨울에도 영하 이하로 떨어지는 일이 잘 없다. 환경오염에 매우 엄격한 주 정부 덕분에 (그래서 밴쿠버에서는 한국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디젤 차량도 매우 드물다) 미세먼지도 거의 없는 수준.


이렇게 좋은 것들만 가득할 것만 같은 밴쿠버지만 가끔 한국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 병원 갈 때

캐나다의 대부분 지역은 공공 의료 정책이 잘 되어 있어서 필요한 병원 진료를 무료로 받을 수 있지만 무료인 만큼 어마어마한 대기시간을 감수해야 하고 - 아침마다 아직 열지도 않은 집 앞 클리닉에 사람들이 줄 서 있는 모습을 보곤 하니까 - 꼭 필요한 진료가 아니면 의사가 해 주지도 않는다. 


여기서는 병원 앞에 줄 서 있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사진= talkpoverty.org

일단 캐나다의 의료 시스템은 한국과는 많이 다르다. 한국에서는 귀가 아프면 이비인후과, 배가 아프면 내과 같은 식으로 바로 해당 분야의 전문의를 만날 수 있지만 캐나다에서는 일반의 (general practitioner)에게 먼저 가서 증상에 대한 진단을 먼저 받아야 전문의에게 진찰 '예약'을 할 수 있다. 


왜 예약을 강조하냐고? 그 예약이 1년 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 주변만 둘러봐도 한국에서 수술한 무릎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MRI를 찍으려면 8달을 기다려야 한대서 한 달 동안 먹을 수 있는 진통제를 받아 왔다는 사람, 스키 타다가 갈비뼈가 부러졌는데 "알아서 붙으니까 놔둬~"라는 말을 듣고 한국에 가서 깁스를 하고 왔다는 사람, 임신을 한 상태로 캐나다에 왔는데 3달 동안 초음파를 한 번도 못 찍어본 사람 (우리 와이프...) 등등, "의료 서비스는 한국이 최고!"를 외치는 사람들이 즐비하다. 물론 나도 그중 하나.


이런 공공 의료가 너무 답답하다면 내 돈을 내고 프라이빗 닥터에게 가서 빠르게 진료받을 수 있는 방법도 있지만 비용이 어마어마하다. 일단 의사 얼굴만 보는 것도 150달러에서 200달러 정도니 암 수술이라도 했다간 몇 억은 순식간이지 않을까.


캐나다 의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흔히 쓰는 표현이 있다. "죽지 않을 만큼만 치료한다." 물론 교통사고나 말기 암 같은 응급 상황에서도 그렇게 느릿느릿 진료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인들의 기준에선 답답한 것은 사실이다. 의료 장비도 정부 예산으로 구입해서 그런지 몰라도 한국의 번쩍번쩍하는 의료 장비에 비하면 너무 초라하다. 정말 꼭 필요한 것만 사는 느낌이랄까. 아직도 와이프와 처음 캐나다에 와서 보험이 안 될 때, 병원에 가서 20만 원 가까운 진료비를 내고 체중을 재는 저울에 올라간 일이 잊히지 않는다. 간호사가 "여기 올라가서 체중 재세요~"라고 말하며 안내해준 곳엔, 어릴 적 시골에 가서 보았던 쌀가마 저울이 위풍당당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 온라인 쇼핑할 때

캐나다에 와서 놀란 것. 그 빠르다는 아마존 프라임 주문을 해도 2일이 걸린다. 아마존이 이렇게 느리다고?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마존이 아닌 쇼핑몰에서 주문을 하고 배송이 일주일 넘게 걸리고 배송비가 10불부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아마존의 성공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택배가 3일 만에 온다고? 혁명이지 암암. 한국처럼 필요한 물건을 전날 주문해서 다음날 받아볼 수 있는 서비스란 여기서는 정말 상상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그 비싼 택배가 한국처럼 친절한 것도 아니다. 캐나다 한인들 인터넷 커뮤니티에 흔히 올라오는 사연들 중에 하나가 "택배기사가 집에 아무도 없다고 택배를 우체국에 맡기고 가버렸어요" 다. 그 우체국이 한국처럼 집 앞도 아니고 차 타고 20분 30분 가야 하는 경우도 흔하고 만약 차가 없다면? 캐나다 대중교통의 허접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 번은 아마존에서 주문한 물건이 부서져서 도착해서 반품을 신청했다. 반품 송장을 부착해서 1층에 내려다 놓으란다. 하필이면 그 날따라 아침에 급하게 회사를 가느라 물건을 못 내려놨는데 택배 기사에게 전화가 왔다.


기사 : "너 물건 1층에 없는데 어떻게 된 거임?"

나 : "내가 바빠서 깜빡했음. 네가 올라가서 좀 들고 와 줄 수 있어?"


기사의 대답. "싫은데?"

전혀 예측하지 못한 기사의 대답에 "그... 그래 그럼 나중에 다시 와"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 밥 먹을 때

밴쿠버 물가가 한국보다 비싸다지만 장을 보러 마트에 가면 생각보다 물가가 비싸지 않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해주는 음식을 먹으려고 하면 문제가 시작된다. 한국에서는 부담 없는 가격에 가끔 점심으로 먹곤 했던 맥도널드 런치 세트도 여기서는 10달러 (한화로 약 8,500원)가 넘고, 식사가 될만한 것들은 그 가격 아래를 찾기가 힘들다. 그나마 저렴한 점심이 이 정도니 조금 괜찮은 레스토랑에서 정성이 들어간 음식을 먹고 세금 5%에 팁 15%까지 지불하고 나면 한 사람당 30불이 넘는 일은 일상.


게다가 밴쿠버에는 '싸고 맛있는' 식당이 없다. 가격이 저렴하면 저렴한 맛을 내고 비싸면 맛있다. 종종 싸고 맛있는 집이 있긴 하지만 그런 집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댄다. 이 사실을 먼저 깨달은 사람은 와이프였다. 여기 도착한 지 한 달 만에 여기서 친해진 언니들을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벌써 현지인 다 됐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정답은 "사람 손이 닿으면 비싸다"는 것이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의 최저 시급은 작년 한국의 두 배에 가까운 $12.65(약 11,000원). 이건 최저 시급이니 당연히 기술이 있거나 숙련도가 있는 일을 시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한국에서 TV 사면 무료로 해 주는 벽걸이 설치도 여기서부터는 $100부터 시작이다.


회사 동료와 점심시간에 잡담을 하다가 내가 이런 불평을 한 적이 있다. 

"우리 너무 세금 많이 내는 것 같지 않아? 거의 버는 돈의 절반 가까이를 세금으로 지출하는 것 같아서 아까워."


그의 대답은 이랬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그 세금 덕분에 아플 때는 무료로 진료를 받을 수 있고, 자연환경을 보존시키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깨끗한 물과 공기를 누릴 수 있는 거잖아? 결국 네가 낸 만큼 받는 거야 (You get what you pay for)."


"You get what you pay for." 


캐나다 사람들의 마인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마디가 아닐까 한다. 더 좋은 의료서비스를, 더 빠르고 친절한 배송을, 더 맛있는 음식과 친절한 종업원을 원한다면 그에 따라서 더 많은 돈을 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저렴한 물건이나 서비스를 구입했다면 품질이나 훌륭한 고객 응대를 바라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다. 저렴하게 구입한 물건이 망가져도 You get what you pay for. 유명한 레스토랑에 갔더니 음식이 맛있어도 You get what you pay for. 


이런 자연이라면 세금 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사진=TripSavvy


캐나다에 와서 생활하다 보니 우리가 한국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누렸던 많은 서비스들은 결국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던 것들이란 생각이 든다. 주문하고 하루 만에 오는 택배 뒤에는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끼니도 못 먹고 돌아다니는 택배 기사님이 고생하고 있었을 것이고, 전화만 하면 30분 만에 오는 치킨은 오토바이를 타고 차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질주하는 배달 기사님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내가 병원에 가서 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전문의의 진료를 받는 동안 어떤 의사 분들은 낮은 의료수가 때문에 치료하지 못하는 환자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희생들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택배 기사님들이 살인적인 노동강도에 항의하고, 병원들이 파업하기 시작하고, 주 52시간 근무에 사회 전체가 이렇게 들썩거리는 건 더 이상 사회 인프라가 이런 희생에 의지하는 일 자체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이야기일 거란 생각을 해 본다. 매년 여름만 되면 한국에서 평양냉면 가격을 가지고 '냉면 한 그릇에 만원을 넘는다는 게 말이 되냐'는 기사를 봤던 기억이 난다. 커피 원두 원가가 오백 원도 안 하는데 커피 한 잔에 4000원이 넘는다는 황당한 이야기는 이제 지겨울 정도다. 모든 사람들이 본인의 노동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받는 사회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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