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에 다시 쓰는 일기 (2)
어느 날 후배에게 연락이 왔다. 꽤나 가깝게 지내고 허물없이 지내던 사이인데, 먹고사는 게 바빠지다 보니 1년에 한 번 얼굴 보기도 힘든 사이가 되었다.
"삶이 허무할 때는 어떻게 해?"
그 말을 듣고 후배의 나이를 떠올려봤다. 20대 청춘에 만났던 후배도 어느덧 40대 초반이 되었다.
천방지축처럼 언제나 생기 넘치던 후배가 마흔이 넘어 나에게 '삶의 허무'를 물어온 것이다.
나는 책에서 본 것들을 쭈욱 이야기해 줬다. 첫 차를 타보고, 도서관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고, 자원봉사를 해보면 삶의 허무가 조금은 덜어질 것이라고.
후배는 그냥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리고는 문득 후배에게 질문을 하나 했다.
"그런데... 사는 게 허무하면 안 되냐? 허무할 수도 있지. 내가 지금 허무를 느끼는구나... 하고 그냥 또 살아. 삶이 허무하지 않고, 강렬한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괴로운 거 아닐까? 허무한 공허감 채우려다가 지치더라."
후배는 열심히 생각해서 해 준 앞의 말들이 아니라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마지막 말이 마음에 든다며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했다. 열심히 말고 그냥 잘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굳이 더 말을 붙이진 않았다.
나는 언제나 꿈과 목표가 뚜렷한 사람이었다.
주변에서 헛된 꿈일 뿐이라고 말려도 이루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룰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중년이 되면서 꽤나 많은 허무함과 허탈함을 느꼈고, 삶의 이정표를 잃은 것처럼 방황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중년이 되면서 그 꿈과 목표에 대한 확신이 희미해져 갔다. 평생 잃지 않을 것 같았던 꿈도 희미해지고, 내가 옳다고 믿었던 것들이 정말 옳은 것인지 확신이 사라지는 경험도 했다. 평생 믿었던 무언가가 무너지는 느낌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결혼과 출산을 핑계 대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건 나의 선택이었고, 그 선택에는 후회가 없다.
중년의 허무를 느끼면서, 나는 애초에 내 목표가 비현실적이었거나 목표를 이루기 위한 나의 노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았다. 목표를 다듬어보고,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워봤다. 그러나 구멍 난 풍선은 아무리 불어도 다시 팽팽해지지 않았다.
그렇게 내 풍선에서 바람이 빠져나간 사이에 풍선 밖에 있던 바람이 불어오면서 풍선을 흔들었다.
커피, 산책, 음악, 사진, 글, 책, 영화, 드라마, 사람...
꿈과 목표를 잃고 방황하며 생긴 나의 허전한 가슴에 많은 것들이 스쳐갔다. 좋게 보면 힘든 시기를 버티게 해 준 '의지'였고, 나쁘게 보면 회피이고 의존이었다. 그런데 의존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쳐도 그럴 수밖에 없는 시기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의존'이라고 하면 나약하거나 안 좋은 것 같으니 '사랑'이라고 바꿔볼까?
그래도 이것저것 거치면서 지금은 브런치를 만나 브런치에 '의지'하며 나를 버티고 있다. 애초에 글쓰기를 좋아하는 성향을 갖고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만일 술이나 담배에 빠졌다면... 게임이나 약물에 중독됐다면... 지금쯤 중년의 내 모습은 많이 피폐해졌을 것 같다.
브런치에 글을 발행하지 않아도 접속해서 작가의 서랍에 글만 쓰고 저장만 해두어도 가슴이 트이고 숨이 쉬어지는 기분이다. 다만, 좀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은 나를 좀 힘들게 한다.
꽤나 힘들었고, 주변 사람들 걱정을 시키면서 방황했다. 지금도 멀쩡해진 것 같진 않지만 많이 나아졌고, 외줄을 타듯 휘청거리면서도 앞으로 잘 나아가고 있다. 휘청거리며 이것저것 시도해 본 덕분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알게 되기도 했다. 후배도 그런 것들을 찾아내서 힘을 좀 냈으면 좋겠다.
후배는 야구를 좋아한다. 열렬한 엘지 트윈스의 팬이다. 후배에게 연락이 왔던 날이 엘지 트윈스와 삼성 라이온즈의 플레이오프 1차전이 열리는 날이었다.
"온 마음을 담아서 응원을 해봐. 무언가에 집중하고 나면 마음이 가벼워지더라. 야구가 너의 가슴을 채워줄 거야."
후배는 답이 없었다.
"스코어 보고 말해. 나 TV 껐어 ㅠㅠ"
이날 엘지는 삼성에 4-10으로 패했고 결국 한국시리즈에는 삼성이 올라갔다. 좋아하는 팀의 패배로 더 깊은 허무에 빠졌을까 걱정했지만, 한국 시리즈 첫날 후배에게 연락이 왔다.
"남의 팀 경기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하네. 야구가 즐겁다."
뭐든 좋다. 너의 허무가 달래질 수 있다면. 단, 나쁜 방향으로 중독되는 것들이 아니라면... ^^
나도 좀 더 찾아봐야겠다. 내가 사랑하고 애정을 쏟을 수 있는 것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