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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태국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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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현 Feb 01. 2019

두 번째 방콕

#방콕일기 2. 두 번째 룸피니 공원



홀로하는 첫 해외여행이자 첫 퇴사 여행인 만큼 좋은 곳에서 묵고 싶었다. 4년간 열심히 한 나에게 주는 선물로. 다만 아직 퇴직금이 나오지 않은 데다 이미 돈 나갈 곳이 많아 예산이 넉넉하진 못했다. 그래서 심혈을 기울여 찾아낸 곳이 바로 <틴트 오브 블루 Tint of blue> 호텔. 방콕의 대표적인 호텔들에 비하면 후기가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호텔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크고 작은 나무들에 이끌려 바로 결제했다. 조식을 먹는 식당에서도, 그리고 룸에서도 고개만 돌리면 온통 푸른빛이었다. (여기에 비교적 저렴한 가격도 한몫했다.)


호텔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옷과 스킨케어용품들을 정리해둔다.


퇴사가 코앞에 다가왔을 땐 전혀 들리지 않던 휴대폰 알람이 이곳 방콕에선 들린다. 입국 수속을 밟고 호텔로 와 체크인을 하고 새벽 4시가 훌쩍 넘어 자리에 누웠는데, 8시 즈음 깼다. 이제 회사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데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 건 불법 아닌가? 퇴사 직전까지만 해도 눈뜨는 게 곤욕이었건만 쉽게 눈을 뜬 내게 실망했다. 그러나 또 생각해보면 비행기에서 구겨진 상태로 푹 잤으니 충분히 잘만큼 자기는 했다. 그래도 왠지 억울함이 가시질 않아 침대에서 한참을 미적대었다.


내일은 야외 테라스에서 먹어야지.


틴트 오브 블루를 선택한 또 다른 이유 하나, 조식! 식당 자체도 예뻤지만 사진 속 메뉴도 먹음직스러워 보이고 예뻤다. 빵 두어 종류와 잼 두어 종류, 과일과 아메리카노는 기본적으로 세팅되어있어 뷔페처럼 가져다 먹으면 되고, 메인 요리라 할 수 있는 달걀 요리와 플러스 햄 등은 주문을 하면 직원이 요리해서 가져다준다. 나는 첫날이니 가볍게 기본 스크램블에 햄, 토마토 주스를 시켰다. 여기에 식빵 두쪽을 굽고 파인애플 두 조각도 추가했다.

 


오늘은 무엇을 할까 하다가 지난 방콕 여행에서 더 오래 머무르지 못해 아쉬웠던 <룸피니 공원>에 가기로 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공원을 참 좋아하네. 오키나와 여행에서도 공원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는데. 아무튼 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호텔에서 아속역 부근까지 (그래도 5분은 걸어야 역이 나온다) 툭툭으로 데려다 주지만, 이번엔 길을 익힐 겸 거절하고 슬슬 걸어 나왔다. 호텔에서 5분가량 걸어 나오니 나타난 큰길! 자세히 보니 내가 아는 길이다. 지난 방콕 여행에서 묵었던 호텔 골목이 내 맞은편에 있었다. 이게 뭐라고 그렇게 반갑고 재미있는지. 길은 단순하고 쉬웠으나 보는 재미는 없어서 그냥 앞으로 툭툭을 타고 다니기로 했다.



이 길에서 아주 작은 아기 고양이 두 마리를 봤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왜 이렇게 말랐지.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뭐라도 사줘야겠다. (라고 생각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보니 먹을 것은 충분해 보였다. 근처에 어미 고양이도 있는듯했고, 아기 고양이 주변에서 장사를 하는 길거리 노점 상인들이 아예 밥그릇에 밥을 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른 거야.)





푸른 방콕,
더 푸른 룸피니 공원


BTS 수쿰빗역에서 표를 끊고, 씰롬역 1번 출구로 나오면 룸피니 공원 정문. 룸피니 공원을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나는 이 길을 가장 선호한다. 익숙한 길로 다니면 지도를 보지 않아도 되어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겨 좋다. 마치 내가 이 곳에 거주하는 주민이 된 것 같아.



호텔에서 역으로 가는 길에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우산을 챙겨 오긴 했지만 조식을 먹을 때만 해도 날이 좋아 놓고 나왔는데! 그러나 룸피니 공원에 도착하니 비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운이 좋구나! 다시 온 두 번째 룸피니 공원은 여전히 푸르렀고 조깅을 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았다. 덩달아 가벼워진 마음으로 홀로 룸피니 공원을 돌아다녔다.



계속 뙤약볕 아래로 돌아다니니 슬슬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한국에 비하면 천국이지. 이제는 동남아 어딜 가도 한국보다는 시원할 거다. 재작년 한여름의 오사카를 경험한 이후, 내가 아는 곳 중 제일 더운 곳이 오사카였는데 올해 한국이 그 기록을 깼다. 태국의 여름은 그보다 더 덥다길래 겁을 잔뜩 먹었지만 한국에 비하면 훨-씬 시원하다.



공원 곳곳에 늘어져있던 사람들. 나 역시 이렇게 누워있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냥 벤치에 앉아 이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 이 여유로움. 아, 이 한가함!



날이 좋아서인지 단체로 소풍을 나왔나 보다. 가만 앉아있다 재잘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몰려온 아이들이 이런저런 게임을 하며 놀고 있었다. 공원 어디를 가든 파란 옷을 입은 아이들로 가득했는데, 옷을 보니 스카우트 연맹 같기도 하고. 아무튼 아이들 소리를 듣고 있으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이보다 더 기분이 좋아질 수가 있다니.



평일이라 그런 건지 조깅하는 사람들과 소풍 나온 아이들을 제외하곤 공원이 한산했다. 덕분에 홀로 공원을 빌린 것처럼 돌아다닐 수 있었다.




한참 아이들을 보다 자리를 옮겼다. 이번에는 어딘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고양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대체 어디를 저렇게 뚫어져라 보는 거야.



고양이를 따라 시선을 옮기니 보이는 것이라곤 빽빽한 나뭇잎뿐. 넌 이게 신기한 거구나.






비터맨 bitterman


점점 더워지기 시작하더니 가만있어도 땀이 주룩 흘렀다. 그래도 여전히 한국보단 시원한 편이었지만. 슬슬 점심 때가 되기도 한터라 근처에 있는 <비터맨 bitterman>에 가기로 했다. 룸피니 공원 근처에는 룸피니 공원에 오면, 아니, 룸피니 공원은 일정에 없더라도 한 번쯤은 꼭 가는듯한 <노스이스트>와 <비터맨>이 있다. 보통 노스이스트에서 식사를 하고 비터맨에서 디저트를 먹거나 커피 한잔을 하는 것 같은데 나는 혼자라 식사-디저트까지 다 먹지는 못할듯하여 처음부터 비터맨으로 향했다. 사실 비터맨 가는 길에 노스이스트를 지나갓는데 줄이 늘어서 있어서 포기했지만.



비터맨도 사람이 많아 처음엔 실내 구석 자리로 안내를 받았다가 직원에게 혹시 해가 드는 창가 자리로 옮길 수 있냐고 물어, 사람들이 나간 후 다시 자리를 안내받았다. 비터맨은 음식의 맛보다도 인테리어와 음식 플레이팅으로 더 유명한 듯 다들 볕이 잘 드는 자리에 앉아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물론 나 역시도.



드디어 메뉴가 다 나왔다! 여기서 많이들 먹는 시나몬 토스트와 호박 수프를 먹었다. 사진만 봤을 땐 분명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받아보니 둘 다 깨끗하게 먹기는 힘드네. 호박 수프는 보이는 그대로의 맛이었고, 시나몬 토스트는 베리 종류가 많아 상큼했다.



식사를 마치고도 잠시 비터맨에 머물며 더위를 날렸다. 그리고 다시 밖으로 나와 비터맨 주변을 돌아다녔다.



발길 따라 생각 없이 걷다 보니 눈앞에 작은 시장이 나타났다. 내가 지금 토스트를 먹고 나온 게 아니라면 이곳에서 로컬 음식을 맛보았을 텐데 조금 아쉬워졌다. 하지만 언제든 다시 오면 되니까.





골목을 돌고 돌아 다시 룸피니 공원에 가기로 했다. 큰 사거리로 나가 횡단보도를 건너는 대신 육교를 택했다. 육교 위에서 내려다보는 도로의 모습이 좋다.



돌아온 룸피니 공원은 여전히 한적했다. 곳곳에 자리를 잡고 누워있는 사람들도 여전했다.




방콕에 오기 전 가족들은 충분히, 잘, 열심히 쉬다 오라고 했다. 아마 난 이 여행이 끝난 바로 그 순간 새로운 회사로 가야 하겠지만 그전까지는 모든 걸 잊고 정말 열심히 쉬어보려 한다. 지금 이 공원에서 느끼는 여유로움이 더 이상 새로운 느낌이 아니게끔 아주 열심히. 쉬는 것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그만큼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여행하는 순간만을 느끼며 일주일을 보내야지.


2018년 7월 24일

캐논 EOS 6D




여행 중 책 읽기 #모든 요일의 기록 #김민철


스물여덟 살, 회사를 그만두고 파리로 가겠다며 회시 책상 앞에 파리 지도를 붙였다. 그러면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곧 갈 수 있다 믿었다. 하지만 '곧'이란 시간은 도무지 오지 않았고, '파리'도 도무지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때부터는 하루하루 버티는 시간이었다. 당장 떠날 용기도 없으면서, 정말 거기에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나는 막연한 꿈을 꾸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그렇게 매일을 버티다 보니 나중에는 내가 무엇을 위해 버티는지도 잊어버렸다. 어느새 내가, 내 청춘이, 내 일상이 불쌍해지고 있었다.


-


9년을 다녀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안 되겠네. 단숨에 포기했다. 9년이라니. 9년을 다녀야 한 달짜리 휴가를 얻을 수 있다니. 이것이 바로 희망고문이구나. 신입사원인 나는 단숨에 한 달짜리 휴가를 포기해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회사에 들어오기 직전 나는 인생의 계획을 세웠었고, 그 어디에도 9년이나 회사를 다닌다는 계획은 없었다. 아무렇게나 세운 계획이 아니었다.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감안해서 꼼꼼히, 몇 가지 경우의 수를 따져가며 세운 계획이었다. 대안도 세 가지나 세웠다. 그러나 회사를 9년이나 다닌다는 계획은 대안에 끼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내 인생에 한 달짜리 휴가는 없을 터였다. 난 장담했다. 하지만 9년이 흐른 후, 나는 한 달짜리 휴가를 얻었고, 어느새 프랑스로 가는 비행기 안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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