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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대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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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현 Sep 13. 2019

오늘의 여행은 재미없었어

#대만일기 5. 가오슝에서 더 이상 할 게 없다면


새벽에 시우민의 노래 스트리밍을 확인한다고 몇 번씩 깼다. 그러다 마지막에 일어났을 땐 가오슝에서 타이난 가는 기차 타는 법 등을 검색하고 이것저것 하다 보니 어느덧 두 시간이 흘러 있었다. 이러니까 정작 아침에 일어나야 할 땐 못 일어나지! 오늘도 역시 어제처럼 조식 마감 시간을 코앞에 두고 부랴부랴 내려가 밥을 먹었다. 어제와 같은 메뉴에 먹을 것이 많지 않아 이때 들어가도 충분히 마감 시간 전에 나올 수 있다. 그래도 오늘은 밥과 김치를 발견해 그나마 어제보단 맛있게 먹었다.



가오슝은 타이베이처럼 볼거리가 많은 편은 아니다. 소도시를 좋아하거나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유명한 관광지가 아닌 다른 곳들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나나 P는 그런 정성을 가진 사람들은 아니라. 그래도 나는 유명 관광지보단 그보다 덜 유명한 곳을 좋아하는 편이고, 때로는 처음 내딛는 골목으로 들어가 주변을 살펴보는 것도 즐기는 편이지만 가오슝은 그럴 만큼 매력적이지 않다. 차라리 컨딩에 더 묵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무튼 우리는 더 이상 가오슝에서 할 게 없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날이 좋은데 호텔에서 누워만 있을 수도 없지. 새벽에 검색도 해봤겠다 <타이난>에 가기로 했다. 조식을 먹으며 근처에 이케아와 까르푸 등이 몰려있다 하여 그곳을 갈까 했다. 그 부근에 공원까지 있다 하니 여행지의 공원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안 갈 이유가 없지. 그러나 대충 찾아보니 공원이 영 별로였다. 그래서 결국 원래 계획대로 타이난에 가기로 했다.





짧게 치고 빠지는
타이난 기차 여행


MRT를 타고 가오슝 기차역으로 와 타이난행 기차 티켓을 발권했다. 바로 2분 뒤에 출발하는 고속 열차가 있었지만 어제 이후로 급하게 교통수단을 타는 것에 넌덜머리가 나서 20분 뒤에 출발하는 로컬 기차를 타기로 했다. 비록 20분 뒤에 출발하는 데다 이동 시간도 30분은 더 걸리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하잖아.

(그러고 보니 고속 열차는 왜 열차고, 로컬 기차는 왜 기차일까. 부르는 사람 마음이긴 하지만. '고속 기차'나 '로컬 열차'는 영 입에 붙지를 않는단 말이지. 마치 칭다오는 칭다오라 부르지만, '니하오'를 붙일 때는 꼭 청도라 부르는 것처럼.)



타이난 기차역은 태국 어느 변두리의 기차역 같았다. 아유타야까지 기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수없이 보았던 그 기차역들. 내가 대만 MRT역들에서 보아오던 정돈된 느낌은 사라지고 로컬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꽤 낙후된 편이었는데 나는 이게 참 좋았다.



비교적 허술한 개찰구를 나오니 택시가 줄지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지이자 사진 찍기 좋은 골목이라는 <선농지에 神農老街>는 기차역에서 그리 멀지 않고 우리 눈 앞에 바로 버스정류장이 있었기에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마침 정류장에 우리가 탈 GR12번이 보였다. 좋아!


이 버스를 타고 서너 정거장만 가면 선농지에 부근에 내려준단다. 그러나 서너 정거장을 지나 훨씬 더 달렸는데도 구글 지도에 나온 우리가 내려야 할 버스 정류장이 나오질 않았다. 무슨 일이야! 급하게 지도를 살펴보니 지금 내려도 될 것 같아 서둘러 벨을 누르고 버스에서 내렸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금도 무엇이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 제대로 버스를 탔고, 버스정류장도 확실하게 확인했는데.)



그리고 지도를 따라 십여분 정도를 걸었다. 오늘따라 날씨가 왜 이렇게 좋은지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걷다 보니 드디어 사진에서 보던 선농지에의 입구가 나타났다. 그들이 말하던 "이른 아침에 가면 사람이 없어요!"의 이른 아침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사진 찍기에는 방해될 만큼은 있었지만.

월요일이라 그런지 문을 연 곳이 얼마 없었다. 그래서 일단 문 열린 곳이 있으면 무조건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중 우리의 시선을 끈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골목 자체도 아기자기하니 예쁘지만 가게들도 전부 매력적인 곳이라 했는데 내게 거짓말을 한 거야?



그러다 P가 타이베이에서 가보고 싶었던 카페 <소일자 小日子>가 이 곳 선농지에도 있다 하여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카페 소일자는 외관과 내부 인테리어 모두 만족스러웠다. 깔끔하고 기분 좋아지는 공간.



카페에서 파는 소품들도 하나같이 전부 마음에 들어 모두 사고 싶었다. 그러나 내 손에 들린 건 작은 스티커 두 장. 이미 컨딩에서 부피가 큰 인형을 샀기에 더 이상 짐을 늘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잔뜩 사봤자 분명 내가 쓰는 건 몇 개 안될 거야. 대신 스티커를 매우 고심해서 골랐다. 무엇을 사든 이곳의 것이라면 다 만족했겠지만.



그렇다면 음료의 맛은 어떤가.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기에 커피 외 것들 중 그나마 무난한 것을 골랐다. 웩! 맛없어라. 비주얼은 나쁘지 않았는데 맛은 형편없었다. 한 모금 마시고 도저히 마실 것이 아니라 다 버렸다. 이곳은 분위기만 팔아야 해.





카페에서 나와 선농지에를 좀 더 걸어 다녔는데 걸을수록 점점 흥미가 떨어졌다. 우리가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걸까, 좁은 골목 두어 개가 전부인 곳이었다.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다들 타이난에 오면 이 곳을 오던데 그나마 이름 있는 곳마저 이렇다면 다른 곳들은 어떻다는 거야? 가오슝이 재미없어 넘어왔건만 타이난은 더 심했다. 



조금 전에 카페에서 나왔지만 음료수를 제대로 마시지도 못했고 점점 더위가 심해져 브런치 카페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카페 잇쇼니 一緒二咖啡>. 주인이 일본인인가 했더니 그건 아닌 것 같고. 사진을 찾아보니 음식들이 다 맛있어 보여 이곳으로 결정. 도착한 카페는 참 좋았다. 소일자도 그렇고 이곳도 그렇고 분위기가 다 너무 좋네.



2층짜리 가정집을 개조한 듯했는데, 건물 전체가 풀로 뒤덮여 있는데도 해가 잘 들었다. 반짝이는 빛에 기분이 좋아졌다. 여기에 음식까지 맛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이 나서 이것저것 주문했는데 전부 다 안된단다. 평일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주인분 혼자 있어 그런 건지 주문 가능한 메뉴가 별로 없었다. 사진을 보고 꼭 먹자고 했던 것들 대부분의 주문이 불가능했다. 음료 역시도. 선택권 없이 주문 가능한 와플과 토스트, 아이스초코와 애플 스무디를 시켰다. 그래 괜찮아, 맛있으면 되지 뭐.



이 모든 것들이 다 나오는데 한 시간이 훌쩍 넘는 시간이 걸렸다. 손이 어찌나 느린지 메뉴 하나에 이삼십 분은 걸린 것 같다. 와플은 와플 기계에 굽고, 토스트도 프라이팬에 굽고. 그러면 끝 아닌가? 그렇다고 이렇게 오래 기다려서 받은 음식이 맛있는 것도 아니었다. P랑 "여기가 백종원의 골목 식당에 나왔다면 한참 전에 문을 닫았어야 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분위기와 주인의 친절 빼고는 전부 형편없는 곳이었다. 타이난은 대실패야!



기대했던 브런치 카페에서 마저 형편없는 시간을 보내고 모든 의욕을 잃은 채 가오슝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버스 시간이 맞지 않아 택시를 타려다 한번 거절당하고 겨우 택시를 잡아타고 기차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가오슝으로. 타이난 역에 '타이난에 오지 않았으면 대만 여행을 한 것이 아니다'라는 슬로건이 붙어있었다. 글쎄. 나는 슬로건을 보며 타이난에 오지 않았더라면 이번 여행이 더 좋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냥 대만에서 짧은 기차 여행을 했다는 것에 의의를 둬야지.





또다시 치진섬


가오슝으로 돌아와 또다시 <치진섬>으로 향했다. 가오슝에서 할 게 없다면 치진섬으로! 치진섬은 내게 있어 방콕의 <방끄라짜오> 같은 곳이 되었다. 아니면 <룸피니 공원>이라던가. 하지만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던가 자전거를 탈 수 있다던가 이것저것 따지면 역시 룸피니 공원보단 방끄라짜오가 맞지. 배를 타고 치진섬으로 들어가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오늘 반나절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날아갔다.



우리가 다섯 시쯤 도착했으니 치진섬에서 일곱 시까지 놀다가 시즈완으로 돌아와 여덟 시로 예약해둔 훠궈 집에 가면 시간이 딱 맞을 것 같았다. 치진섬에서는 어제 못 가봤던 곳에 갔다 바에서 칵테일을 마시기로 했다. 바다의 노을을 보면서. 완벽한 계획이야! 그러나 우리의 계획은 시작부터 어그러졌다. 계획대로라면 일곱 시까지 자전거를 타야 했는데 자전거를 여섯 시까지 반납해야 했다. 그때 문을 닫는다나. 고작 한 시간으론 우리가 이곳에서 하려던 것들을 다 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자전거도 못생긴 것만 남았어.



우리에게 무슨 힘이 있나. 그냥 빌렸다. 노을을 보며 마시는 칵테일은 포기하고 어제 가보지 못했던, 오늘은 꼭 가보자고 했던 바위 터널에 갔다. 터널은 칵테일을 포기할 만큼 멋진 곳은 아니었다. 터널 너머는 커다란 선인장도 있고 길게 난 산책로도 있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서둘러 돌아 나와 어제 절벽 위 전망대 같은 곳에 사람들이 서있던 것을 떠올리곤 그곳으로 향했다.



전망대에 올라 바라본 치진섬은 나의 기대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오래된 서양 어드매의 탑에 올라서 있는 것 같았다. 가만 앉아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고 사진도 찍으며 짧게나마 시간을 보냈다.




전망대에서 내려오니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20분도 채 되지 않았다. 안돼, 나는 어제 갔던 그 해변에 또 가고 싶다고! P가 엄청 밟았지만 속도가 정해져 있어 어제의 그곳까지는 가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히 그 부근까지는 가서 어제와 비슷한 곳을 찾아 기념사진을 찍었다. 



여섯 시에 문을 닫는다지만 내 생각에 5분 정도는 늦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나 P가 엄청 안절부절못해했다. 그래 그럼 이만 돌아가자! 자전거를 타자마자 주변을 둘러볼 겨를도 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6시가 다가워질수록 "2분 남았다!" "1분 남았다!" 하며 놀리듯 P를 재촉했다. 그리고 결국 여섯 시에 도착! 와, 이걸 해내네. 자전거를 반납하고 보니 시간 맞춰 반납한 사람은 우리밖에 없는 듯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자전거는 없지만 이대로 시즈완으로 돌아가기엔 아쉬워 치진섬을 조금 걷기로 했다. 치진섬에서 해지는 모습을 꼭 보고 싶어 적당한 뷰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내 마음에 쏙 들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무난한 포인트를 찾았다. 할아버지들이 피워대는 담배 연기에 금방 벗어나야 했지만. 



오늘은 치진섬 마저도 아쉬움만 남기는구나 하며 우울해졌다. 치진섬에 들어올 때만 해도 쌓여있던 스트레스와 우울함이 날아갔는데 다시 그 기분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도 잠시, 페리를 타자마자 이 모든 우울함이 싹 날아갔다. 페리에 타 등을 돌린 순간 내 앞에 나타난 노을. 해가 분홍빛 하늘을 만들어 내며 바다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다. 와, 노을이야! 모두가 각자의 핸드폰과 카메라를 꺼내 들고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흥분하며 셔터를 눌러댄 건 나였다.



해지는 순간은 정말 찰나였고 시즈완에 도착했을 땐 분홍 하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여운이 길게 남았다.






치진섬을 뒤로하고 어제 호텔 직원에게 부탁해 예약해두었던 <천수모 솜사탕스키야끼 天水玥秘境鍋物殿>로 갔다. 예정보다 빨리 도착했다. 혹시 자리가 나면 더 빨리 들여보내 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얄짤 없이 여덟 시에 들여보내 주었다. 식당 문이 열릴 때마다 틈 사이로 거대한 부처의 얼굴을 구경했는데 식당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보니 더 놀라웠다. 정말 크네.



돈이 꽤 남아있어 푸짐하게 주문했다. 2인 세트를 시키고 오징어 완자, 버섯 세트, 그리고 맛있지만 비싸다던 고기까지. 주문이 끝없이 이어지자 직원이 놀라며 양이 많은데 괜찮냐고 물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못 먹어도 고! 노빠꾸 (feat. 엑소 세훈)!

나는 마라탕을, P는 이곳의 명물인 솜사탕 스키야끼를 시켰다. 솜사탕을 구경하고 싶었는데 내가 화장실에 다녀온 새 솜사탕 멋 부림 타임이 지나갔다. 에이 아쉬워라. 마라탕은 맛있었지만 칠리소스가 없어 아쉬웠다. 마라탕의 매운맛을 칠리소스로 눌러주며 먹어야 정말 맛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솜사탕 스키야끼 시킬걸. 솜사탕 스키야끼를 남녀노소 모두가 좋아할 맛이었다. 고기를 넣어 먹으니 단 불고기 맛이 났다. 조금 달긴 하지만 이걸 싫어할 사람은 없지 싶은데. 칠리소스의 아쉬움만 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식사였다.




저녁까지 먹었지만 우리의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원래는 내일 공항 가기 전에 까르푸에서 이것저것 사려했었다. 예를 들면 젤리라던가 젤리라던가 젤리. 생각해보니 그것들을 사면 캐리어에 넣어야 하잖아? 공항에서 캐리어를 열고 짐 정리를 하고 싶지는 않아 오늘 저녁에 까르푸까지 다 털고 모든 짐 정리를 끝내기로 했다.

까르푸는 타이베이 시먼딩 보단 작고 칭다오의 까르푸보단 조금 크거나 비슷한 규모였다. 그래도 팔건 다 팔더라. 나는 젤리만 네 봉을 샀다. 예전에는 대만에 오면 펑리수다, 누가 크래거다 뭐다 잔뜩 샀지만 이젠 그것들을 다 사기에 내가 별로 흥미가 없어. 남들 사다 주는 것도 지쳤다.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오늘 하루를 돌이켜보면 정말 재미없고 힘 빠지는 하루였다. 과연 내가 다시 가오슝에 올까?


2019년 5월 13일

캐논 EOS 6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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