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모든 탭 백주에는 전용잔이 있어.
'This is Micky.' 얘는 미키야.
캐롤라인 Caroline이 바 bar에 앉아 있는 손님들 이름을 부르며 등위에서 나타났다. 구원투수 등판! 그녀를 알고 지낸 기간을 통틀어 제일 반가운 순간이었다. 신발에 바퀴가 달린 것처럼 부드럽게 등장해 바 아래 선반에서 잔 두 개를 꺼내더니 늘어선 탭 tap들 사이에서 능숙하게 맥주를 따랐다. 맥주를 따르는 동안에 새로운 직원이라며 나를 소개하고 나에게도 그들의 이름을 알려줬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물론 난 그들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여하튼 손님들과 캐롤라인 사이 맥주를 건네주고도 받아 마시는 동작들이 물 흐르듯이 이어지고 그 와중에 서로의 안부를 묻느라 오디오가 비지 않는다. 이곳은 스몰토크의 제국, 영국 아닌가.
넋을 놓고 세 사람을 바라보다 문득 손님 둘의 맥주잔이 약간 다르게 생겼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렇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맥주는 전용잔이 있다. '전용잔에 부어 마셔야 그 맥주만의 풍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라고 최근에 찾아본 맥주커뮤니티 게시판에 맥주 전문가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이 쓴 걸 봤다. 난 평생 이 문장의 진위를 파악할 수 없겠지만 전문가는 괜히 전문가가 아닐 테니 일단 믿는 수밖에. 한국에 살 때 가본 술집에서는 다 똑같이 생긴 맥주잔에 맥주 이름만 다르게 적혀 있어 맥주잔은 그저 홍보의 수단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한 모양이다.
참고로 암스텔과 페로니는 손잡이가 없는 길쭉한 유리잔에 부어 마시는데 암스텔 잔보다 페로니 잔의 아랫부분이 잘록하다. 유리잔에는 각각의 맥주 이름과 로고가 적혀있어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전용잔을 찾는 데엔 무리가 없어 보였다. 물론 아직도 지독하게 헷갈리는 두 개의 유리잔이 있는데 이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더 자세히 하기로 하자.
자, 그렇다면 나의 고행은 여기서 끝인가? 그럴 리가!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들은 파인트 pint가 무엇인지 알까? 구글을 찾아보면 '파인트는 영국에서 쓰는 액량의 단위이다.'라고 나온다. 한국에서만 생맥주는 마셔본 사람이라면 생소할 단어다. 한국에서 생맥주는 주문할 땐 cc를 쓰지 않던가. 호프집에서 3000cc를 시켜 혼자 다 마시는 걸 자랑으로 여기던 정신 나간 청춘들이 가득했던 90년대 신촌거리를 걸어본 나 같은 중년은 맥주는 시킬 때 파인트를 쓰는 이곳의 방식에 영 정이 붙지 않는다. 그래도 바 메이드 bar maid로 일하기에는 이곳이 편하겠지. 3000cc를 두 손에 들고 테이블 사이를 휘젓고 다니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곳 영국에는 하프 파인트 half pint가 존재한다.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1/2 파인트인 건데, 이렇게 되면 얘네들은 어느 잔에 따라야 하는가? 빙고! 맥주의 나라답게 맥주마다 하프 파인트잔이 있다. 그렇다고 탭에 있는 모든 맥주가 하프 파인트 전용잔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동네 펍에서 현재까지 목격한 하프 파인트 전용잔이 있는 맥주는 페로니 Peroni와 비라 모레티 Birra Moretti이다. 그렇다고 다른 맥주들을 하프 파인트로 주문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전용잔에 담긴 맥주를 마시는 호사를 누릴 수 없을 뿐.
맥주에 맞는 전용잔을 집어 들었다고 안심하면 안 된다. 이제 맥주 따르기라는 봉우리를 정복할 차례고 이 봉우리는 만만치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