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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ctuary Nov 22. 2022

비스듬히 누워서 꽃을 피우다

아홉번 마디가 꺾이는 구절초


이번 봄부터 시작되어 초가을까지 지속된 극심한 가뭄과 간헐적 폭우로 인해 우리 집 정원은 초토화되었다.


작년 가을, 아스틸베(노루오줌)가 잘 자라서 아름다운 꽃을 피워주었기에 이번 봄에 야심차게 아스틸베 종류별로 숙근(뿌리) 아홉 개를 주문해서 정성스레 심어보았다. 그러나 여름이 오기도 전에 그 중 절반이 말라가고 나머지도 비실비실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왜 저렇게 안자랄까 안타까운 마음에 가드너 친구에게 전화했더니 깜짝 놀라면서 어린 식물을 식재한 후엔 아기를 매일 목욕시키듯그렇게 매일매일 물을 줘야 한다고 했다. 지난번 그 친구가 너희 집은 음지 정원이라 자주 물 주면 과습된다고 해서 일부러 물주기를 자제하고 있었는데... 융통성이 부족한 초보가드너의 실수로 어린 식물들이 성장을 못하고 죽거나 간신히 버티고 있었던 거였다. 그 말을 듣고 한동안 거의 매일 어린 아스틸베들에게 물을 주었지만 곧이어 사납게 등장한 태풍과 폭우는 어리고 비실비실한 식물들을 뿌리채 흔들어놓았고 지금은 몇몇 아이들만 겨우 살아남은 상태이다.


물론 오랜 세월 이 정원 한켠에 깊숙히 버티고 있는 은행나무와 목련, 대추나무는 이런 가뭄과 폭우는 수십번 겪어본 듯 의연하게 살아있고 여름이후 부쩍 잎 크기가 커지고 무성하게 자란 호스타들도 부분적으로 잎은 말랐지만 건재하고 있다.

  

은행잎으로 뒤덮인 호스타들


나의 무지와 게으름때문에 식물들을 말라죽게 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정원에 나와서 눈으로 직접 볼 때마다 마음까지 쿵 무너지는듯한 기분이 들어서 한동안 정원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계절이 바뀌어 가을이 되면서 여느 해처럼 창문너머로 노오란 은행잎이 보이고 스산한 바람과 함께 우수수 은행잎들과 은행열매들이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들이 내 발길을 다시 정원으로 이끌었다.





"모든 꽃이 다 똑바로 서서 꽃을 피우는 건 아니야. 옆으로 쓰러질 듯이 누워서 꽃을 피우는 식물도 있어."



이 혹독한 기후와 가드너의 방치에도 불구하고 아직 살아남은 식물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 빨간 꽃을 피운 구절초는 정말 의외였다. 작년 여름, 빨간 색, 흰 색 꽃을 피운다는 야생화 구절초 작은 모종 두 개를 라일락 나무 옆에 심었었다. 나란히 심은 두 개 중에 흰꽃을 피우리라 기대했던 구절초는 올해 초 완전히 말라붙어 죽어버렸다. 그래서 하나 남은 구절초도 정원의 흙과 안맞아 곧 죽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여 별 기대없이 방치했는데 올해 들어 놀랄만한 번식력으로 개체 수를 늘려갔다. 그런데 가을이 와도 줄기에 무성한 잎파리를 뻗어가며 쭉쭉 자랄 뿐, 꽃이 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점점 멀대같이 키가 크게 자라면서 바람에 흔들리고 자꾸만 쓰러지길래 줄기가 꺾일까봐 지지대를 해서 묶어주었다. 그런데 가드너인 친구와 얼마 전에 전화통화를 하다가 구절초가 개체수를 늘리면서 키만 커간다고 그래서 쓰러지지 않도록 묶어주었다고 말했더니 깜짝 놀라며 구절초는 비스듬히 누워서 마디를 꺾어가며 뻗어가는 식물이라며 당장 묶은 걸 다 풀어주라고 했다. 역시나 또 나의 무지함 때문에 구절초는 뻗어가지 못하고 키만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작은 포트에 담겨온 구절초 모종



'구절초'((九節草)는 이름처럼 아홉 마디 꺾인다고 해서 구절초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하고 음력 9월9일에 꽃이 피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홉 번 꺾인다는 유래가 더 마음에 든다. 줄기가 꺾여도 죽지 않고 계속 옆으로 누워서 자라나는 이 식물의 독특한 생태에서 힘이 느껴져서이다. 


친구 왈, '모든 꽃이 다 똑같은 자세로 꽃을 피우지는 않아'


국화류의 일종으로 봄과 여름에 앞다투어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다른 식물들과는 달리 황량한 늦가을에 꿋꿋하게 버티며 꽃을 피워 우아한 자태를 보여주는 구절초는 예로부터 군자의 모습을 상징했다고도 한다. 17~18세기에 일본을 거쳐 서양으로 넘어간 국화류의 꽃말은 '역경에도 꺾이지 않는 쾌활함'이라고 하니 이 식물의 특성에 대한 동서양의 견해가 일치하는 것 같다. 



거센 바람을 버티며 쓰러질 듯 꽃을 피운 구절초




"비바람에 흔들려 쓰러져서 내가 죽은 줄 알았죠? 거친 바람과 비때문에 흔들리고 쓰러졌어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비스듬히 누운 채로 예쁜 꽃을 피웠답니다."  



나는 왜 구절초가 바닥에 꺾여 쓰러졌을 때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을까? 그런 위치 (내가 보기엔 비정상인 위치)에서도 잘 성장하고 꽃도 피운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것이 이 식물의 특성이자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저 내가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이 옳다고만 고집스럽게 생각했다.

태풍의 탓도 하지 않고, 물을 제때 주지 않은 정원지기의 탓도 하지 않고 그저 불평없이 '누워서' 제 할일을 한 구절초를 보며 나도 불평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해가 들지 않는 이 정원을 계속 사랑해주고 보살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정말 오랜만에 하게 되었다.


바닥에 비스듬히 줄기가 누워진 채로 꽃이 핀 구절초의 모습
가지가 꺾여서 아래로 늘어진 꽃
화분에 있다가 정원에 식재한 남천도  빨간 열매를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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