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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ctuary Jun 15. 2022

늦깎이: 뒤늦게 활짝 꽃피우는 사람

모든 걸 남들보다 조금씩 늦게 시작하는 삶


식물은 각자 자신에게 적합한 시간에 꽃을 피우고, 삶의 다음 고리로 연결해갑니다. 사람도 저마다 꽃을 피우는 시간이 다를 겁니다. 어떤 사람은 일찍 찾아올 수도, 어떤 사람은 늦게 찾아올 수도 있겠죠. 중요한 건 일찍 꽃을 피우는 것보다 나에게 맞는 시간에 꽃을 피우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아닐까요? 꽃이 피는 순간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식물학자의 노트>(신혜우) ‘Chapter 1. 빛나는 시작’ 중에서)


남들과 똑같이 템포를 맞춰  필요는 없지만   차이만 나도 언니, 형이라 부르는 우리 나라 문화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비슷한 시기에 비슷비슷하게 하는 일을 제 때 못(안)하고 뒤늦게 하는 경우, 그걸 개인적인 특성이라고 존중하기보다 유별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결혼이나 출산, 혹은 학교 입학 시기 같은 일이 그런 예일 것이다.


오래 전, 석사과정 장학금 신청서를 영어로 쓸 때 내 소개를 해야 해서 영국인 친구에게 '늦깎이'를 영어로 어떻게 표현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늦깎이 의미에 대한 설명을 듣더니, 아 그건 'Late Bloomer' 라고 표현한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요며칠 전 '늦깎이'의 한글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본래 뜻이 '늦게 (머리를) 깎은 사람' 즉, 승려를 말하는 단어였다.



늦깎이:  발음 [ 늗까끼 ] 명사  

1.  나이가 많이 들어서 승려가  사람 

2. 나이가 많이 들어서 어떤 일을 시작한 사람.
 (늦깎이로 시작한 연기 생활이었던 만큼  길이 

   순탄치 않았다)

3.  남보다 늦게 사리를 깨치는 . 또는 그런 사람.

4.   과일이나 채소 따위가 늦게 익은 .


'늦깎이' 반대말은 '올깎이.' 이른 나이에 머리를 깎고 승려가  사람이다.  아무 생각없이 쉽게 썼던 말의 기원이 사실 불교와 관련되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늦깎이가 다소 무겁고 비장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면 영어 표현 'Late Bloomer' 꽃을  늦게 활짝 피운다는 뜻으로  의미가 한결 가볍고 긍정적으로 느껴진다.


대체로 많은 식물들 봄에 활짝 꽃을 피우는 반면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것마냥 유독 혹독한 겨울추위를 견뎌내고 꽃을 피우는 식물들이 있다. 대표적인 식물이 동백꽃과 크리스마스 로즈(헬레보루스).  


천리포수목원에서 발견한 붉은 동백꽃

한겨울에 개화하는 동백꽃. 꽃이   꽃잎이 하나씩 떨어지는 대신 동백꽃은  한송이가 통째로 온전히 모양을 갖춘   떨어진다고 해서 예로부터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기도 한다 (촬영비화:  천리포 꽃사진은 동백나무 아래에 떨어진 꽃이 하도 흐트리짐없이온전하고 예뻐서 주워서 잎들 위에 올려놓고 찍은 이다).


엄동설한에 꽃을 피우는 동백은 날씨가 추울수록 더 진한 색깔의 더 큰 꽃잎을 피운다고 한다. 이 역시 여러 면에서 인생의 여러 단계 중 한가지 쯤은 늦깎이인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시련이 혹독할수록, 앞이 캄캄할수록 나만의 시간을 받아들이고 견뎌낼 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그 때'에 꽃은 핀다. 대체 누가 언제 꼭 그 때에 그 일이 일어나야만 한다고 정해놓았는가? 정해진 때에 결혼하고 정해진 때에 아이를 낳고 정해진 때에 일을 시작하고 정해진 때에 일을 그만두고..그럼 정해진 때에 모두 같이 죽으면 어떨까? 


나의 정원에도 늦깎이, Late Bloomer 하나 있다. 바로 '크리스마스 로즈'라고 불리는 헬레보루스(Helleborus)이다. 꽃말은 '나의 불안을 진정시켜주세요' 그리고 '존재의 이유'라고 한다.


우리집 정원에 핀 크리스마스 로즈

작년 , 우리  정원이 아직 황무지일  숲가드너 친구가 가져와서 심어  어린 크리스마스 로즈  포기.


가을 지나서 초겨울 들어설 때까지 커다란 은행나무의 노란 잎들이 폭탄처럼 쏟아졌기에 그 아래에서 있는듯 없는듯 까부라져있어서 친구가 가끔 크리스마스 로즈 꽃 피웠냐고 물으면 죽었다고 슬프게 대답했다. 꽃은커녕 초록 잎들도 잘 안보였기 때문이다. 그 때마다 친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존재조차 드러내지 않았던 그 식물이 눈이 그친 추운 2월 어느 날 ‘갑자기’ 꽃을 피웠다. 그것도 두 개로 개체를 늘려서! 물론 내 관점에서 '갑자기'일 뿐, 이 꽃은 추위와 바람과 싸우면서 겨우내 치열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피어야할 때 존재가 희미했다가 뒤늦게 피어나는 이 꽃들처럼 나 역시 늦깎이이다. 


나는 운좋게 대학교까지는 별탈없이 지나갔지만 그 이후부터는 많은 일들을 남들보다 뒤늦게 시작했다. 잘 다니던 출판사에서 영화에 빠져 직업을 바꾸는 바람에 출판사 대리에서 영화제작사 제일 끝자리 막내로 들어갔고 영화 관련일들을 이어가다가 아주 뒤늦게 공부 발동이 걸려서 남들보다 훨씬 나이들어 영국에 유학을 다녀왔으며, 귀국 후에는 평생 기대하지 않았던 출산과 양육이라는 대사건을 뒤늦게 맞이했다. 내가 시작할 즈음에는 이미 다른 많은 이들은 내가 하려는 일들을 거의 마친 상태거나 그 단계를 넘어선 상태인 적이 많았다. 그래서 항상 남들보다 뒤처지고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불안하게 살았던 것 같다. 영화일을 처음 할 때도 나보다 훨씬 어린 친구들에게 일을 배워야했고 유학을 가서도 내 또래 (한국) 사람이 없어서 어린 친구들 사이에서 늘 겉도는 느낌이 컸다. 귀국 후에도 교수사회 진입장벽이 너무나 버거웠고 아이 키울 때도 젊은 엄마들 사이에서 허둥대며 살았다. 

사실  영국에 있을 때에는 우리나라에서처럼 '나이'에 크게 얽매이지는 않았던 거 같다. 겉으로 보아서는 할아버지와 손자인듯한데 실제로는 나이든 아빠와 어린 자녀인 경우가 많았고 그게 사회적으로 크게 이상한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나이가 많다고 권위를 내세우거나 존경을 강요하는 경우도 없었고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하는 경우도 별로 없었다(적어도 공적인 영역에서는). 


전에 근무했던 대학교에서 학기별로 내 강의만 따라다니면서 수강한 학생이 있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았던 '만학도'였다. 당시 그 학교에선 일반적인 학생들보다 뒤늦게 나이들어 대학교 입학하는 경우 가산점을 주고 입학을 장려하는 장학금제도가 있었다. 만학도인 그 분은 어린 학생들보다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어했지만 공부는 훨씬 열심히 했다. 그리고 그 수업 기말시험이 끝나고 종강하면 꼭 그냥 가지 않고 교수님 감사하다고 진심어린 인사를 여러번 하고 가셨다. 신안군이 고향이라고 꼭 한번 놀러오라고 하셨던 그 분이 생각난다.  뒤늦은 공부를 초조해하지 않고 즐겁게 열심히 했던 그분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가만히 뒤돌아 생각해보면 나는 왜 내가 늦게 시작했기에 남보다 더 뒤처지면 안된다고 생각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내가 남들보다 더 앞서가야만 할 이유가 있었을까? 남들보다 더 나아야, 더 빨리 앞서가야 아니 적어도 비슷하게 행보를 해야 행복할 거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잘못된 시작이었다. 내가 나만의 시간과 속도로 진행하면 될 것을...그때 무엇때문에 그렇게 쫓기는듯 급한 마음으로 살았는지 모르겠다.  



고개를 들지 않고 늘 떨구고 있는 크리스마스 로즈


한겨울 추위에 꽃을 피우기 시작해 따뜻한 봄이 오면 스르르 꽃이 지는 크리스마스 로즈. 


이 꽃의 특징 중 하나는 고개를 꼿꼿이 세우지 않고 아래로 숙인다는 점이다. 꽃봉오리 뿐 아니라 가지도 유연하게 늘어져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몸을 맡겨 이리저리 흔들리지만 절대로 꺾어지거나 부러지지 않는다. 그래서 꽃사진 찍기도 쉽지 않다. 꽃의 중앙 꽃술을 제대로 담으려면 내가 몸을 땅 쪽으로 무릎을 굽혀 올려다보아야 겨우 찍을 수 있다. 나는 이 꽃의 별칭이 '크리스마스 로즈'인 이유가 한겨울 눈발이 날릴 때 꽃이 피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성탄에 예수님에게 경배하는 모습같아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게다가 이 꽃은 늦게 피는 대신 개화시기가 매우 길다. 1,2월에 자그마한 봉오리를 맺기 시작한 꽃이 5월 넘어서까지 비록 조금씩 시들어가지만 아직도 제모양을 유지한 채 가지에 매달려있다. 늦게 피는 꽃이지만 오래도록 아름답게 피어있다. 


Old Lady Reading (Cowan Dobson, 1915)


나의 엄마는 지금 고등학교 3학년, 고3이다. 그 시대를 살았던 분들이 그러했듯이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시절을 다 겪어내시고 난 후에 정말로 늦게 용기를 내셔서 공부를 시작하셨다. 중학교 과정부터 학위과정을 따기 위해 치열하게 하나씩 올라오신 엄마는 올해 83세이시다. 시작하실 때는 대학교도 가시겠다는 포부가 있었지만 조금씩 본인의 체력과 학습능력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올해를 마지막으로 이 공부는 정리하시려는 것 같다.  엄마를 평생 보아왔지만 최근 6년 동안 본 엄마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고 치열하고 행복해보인다. 남편 대신 가장역할을 평생 힘들게 해오신 엄마. 늘 자식 일로 동동거리며 가족 안에서 '엄마'와 '아내'로 살아오다가 7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되어 자신만의 일을 뒤늦게 시작하셨다.  뒤늦게 꽃을 피우지만 오래도록 아름답게 살아있는 크리스마스 로즈처럼 엄마의 시간도 그렇게 유연하게, 생기있게 오래 지속되면 좋겠다.



                    

이 글은 Kenny작가님의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나이는 중요치 않다 (brunch.co.kr)를 읽고 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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