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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ctuary Oct 27. 2022

그 사람을 기꺼이 놓아줄 수 있나요?

영화 <미라클 벨리에>(La famille Bélier)와 보살핌의 영성

영화 <미라클 벨리에>는 프랑스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청소년 자녀가 부모를 돌보는 처지에 있다는 점에서  <길버트 그레이프>와 유사하지만 <길버트 그레이프>보다 훨씬 가볍고 밝은 분위기에서 진행된다. 이 글은  소리(음성)로 소통하지 못하는 가정에서 가족 중 유일하게 건청 자녀인 주인공 폴라가 청각장애인 가족구성원을 어떤 방식으로 보살피는지, 음악에 대한 자신의 재능을 깨닫고 가족과 어떻게 소통하며 성장해가는지를  살펴보고, 나아가 가족구성원 간 돌봄에 있어서의 상호의존성과 부모-자녀 간 관계적 의미의 중요성을 알아보고자 한다.        



청소년 자녀가 부모를 돌볼 때에도 보살핌의 상호관계성이나 성장이 가능할까?

  

앞의 글  <길버트 그레이프>https://brunch.co.kr/@cinemacampus/17#comment 에서 에서 강조한 것처럼 보살핌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한 쪽이 일방적이어서는 안되며 서로가 서로를 관계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할 때 비로소 온전한 의미의 보살핌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나딩스, 2002).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에서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는 신체적·정신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엄마를 자녀들이 돌본다는 점에서 (물론 막내이자 지적장애인인 어니는 제외다) 부모-자녀간 보살핌의 대상이 역전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도 부모-자녀의 보살핌의 관계가 일반적이지 않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폴라는 청각장애를 가진 가족 중 유일하게 소리를 듣는 비장애인 자녀이다(전문용어로는 ‘건청자녀’라고 한다). 엄마, 아빠, 남동생이 모두 농인이기에 가족들은 전적으로 폴라를 통해 외부와 소통하며 폴라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며, 부모의 입과 귀 역할을 하는 폴라에게는 자신의 일보다 언제나 가족의 일이 최우선이다. 어느 날 폴라는 전학 온 가브리엘에게 반해서 그를 따라 학교 합창부에 들어가는데, 폴라의 노래를 들은 선생님은 폴라에게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선생님은 폴라에게 파리에 있는 합창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오디션을 볼 것을 제안하고 연습을 도와주지만, 폴라는 파리에 가면 가족과 떨어져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쉽사리 마음을 정하지 못한다 (아래 글부터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장터에서 치즈를 판매하는 가족들


 <미라클 베리에>의 폴라 가족처럼 농아인 부모와 건청인 자녀로 구성된 가정에서 건청인자녀는 부모를 대신해 의사소통을 해주는 경우가 많고 음성 통역을 통하여 가족과 사회적 관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건청 자녀들은 부모의 수화를 통역하는 역할을 도맡아야 하며 이로 인해 과도한 역할 수행에 대한 부담과 갈등을 가지고 있다. 이 영화에서도 비록 폴라가 길버트처럼 생계를 꾸려나가는 부담을 전적으로 지고 있지는 않지만, 폴라는 가족 중 유일한 건청 자녀로서 부모의 사업과 일상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자질구레한 일들을 통역하고 있는데 이는 언뜻 보아도 십대 자녀에게 과중한 역할 수행임에는 분명해보인다.


젖소를 키우고 치즈를 제조해서 판매하는 축산업에 종사하는 폴라의 가족


폴라는 등교하는 스쿨버스에서 축산업을 하는 아버지의 사업 파트너에게 업무를 전달하는 통화를 하며, 아버지의 시장 출마로 인한 각종 이벤트에 동원되고 심지어 부모의 산부인과 진료에도 따라다녀야 하는 모습이 보여진다. 또 새벽에 소를 돌보느라 잠이 부족해서 학교 수업에서는 꾸벅꾸벅 졸기 일쑤이며 주말에 온가족이 마을의 시장에서 치즈를 팔 때도 폴라없이는 통역이 안되므로 판매자체가 불가능하며 귀가 들리지 않는 남동생의 공부까지 폴라가 도와주어한다. 이렇게 가족의 일에 많은 시간을 쓰던 폴라가 정작 자신의 재능을 위해 노래 연습을 할 시간을 내는 건 쉽지 않다. 게다가 가족들에게 파리로 오디션을 보기 위해 연습을 한다는 것을 솔직하게 말할 수 없기에 남자친구와 데이트한다고 속이고 몰래 연습에 참여한다.        


학교 합창부 선생님은 폴라의 재능을 알아내고 오디션을 보라고 격려한다


결국 폴라는 오디션을 위해 노래연습을 한다는 것을 가족에게 들키게 되고 남아있을 부모에 대한 걱정과 엄마의 극심한 반대로 인해 오디션을 포기한다. 다행히 아버지는 학교 합창발표회에 다녀온 후 뒤늦게 폴라의 진심을 이해하고 엄마를 설득하여 폴라를 보내주기로 결심하고 가족의 도움으로 폴라는 극적으로 파리 합창학교의 오디션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게 된다.



남겨지는 자의 두려움: 독립하려는 자녀를 기꺼이 놓아줄 수 있을까?   



영화의 첫 장면은 폴라 가족의 농장에서 아기 송아지가 태어나는 모습에서 시작된다. 폴라는 수의사가 송아지를 받는 것을 도와준다. 엄마소는 얼룩이지만 태어난 송아지는 엄마와 전혀 다른 색인 새까만 색이라 ‘오바마’라는 별명이 붙여지는데 영화 안에서 폴라가 성장하고 독립하려는 모습과 오버랩된다. 농장과 집이 소리가 없는 ‘침묵’의 세계라면, 집을 떠나 학교로 가는 길부터 폴라에게는 시끌벅적한 ‘소리’의 세계가 펼쳐진다. 제대로 목소리를 내서 노래를 불러본 적이 없는 폴라가 선생님의 지도로 엄청난 고음을 낼 수 있게 되자 폴라는 화장실로 달려가 눈물을 흘린다. 이 장면은 폴라가 이제 부모의 곁을 떠나 자신만의 세계를 찾아 독립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얼룩소 엄마 룰루에게서 태어난 송아지 오바마


영화에서 폴라가 자신의 재능을 깨닫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부모로부터 독립하려는 의지를 표현하자 청각장애를 가진 부모, 특히 엄마는 건청인 폴라가 성장하고 있으며 세상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것에 두려움을 가진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부모가 자식을 독립시키는 과정에서 부모가 겪게 되는 갈등의 서사  수도 있다.  엄마는 폴라에게 떠나지 말라고 눈물로 호소한다. 그런데  이유가 아직 폴라가 어리기 때문에 엄마의 돌봄과 보호가 필요하다는 점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 난 듣지 못하기 때문에 너에게 좋은 엄마가 되지  못했어. 널 끝까지 돌보는 건 내 몫인데 왜 우리를 떠나려 하니?"


떠나려는 폴라를 말리는 엄마


사실 폴라 부모의 공포에 가까운 이러한 두려움은 일반적인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독립시키는 것에 대해 가지는 감정과는 차원이 다르다. 왜나하면 이들 부부에게는 폴라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창구였기 때문에 폴라가 떠난다는 것은 곧 세상과의 소통에 장애가 생긴다는 것을 의미하며 폴라 아버지의 말대로 “우리만 남겨지는 것”에 대한 공포 때문에 더욱 폴라를 자유롭게 놓아주기 힘들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폴라의 부재에 현실적으로 대처하려는 아버지와 달리, 폴라의 엄마는 가족을 떠나려는 폴라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한다. ‘네가 태어났을  차라리 농아이길 바랐다 엄마의 서글픈 고백을 듣고 폴라는 크게 상처받고 오디션 참가를 포기한다.



"도망가는 게 아니에요.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거에요! "       

  


폴라의 가족은 학교 합창부 공연에서 폴라가 소리를 내며 노래를 부르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비로소 폴라가 속한 ‘소리’의 세계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 합창부 발표 장면은 귀가 들리지 않는 폴라 부모와 남동생의 관점에서 노래하는 사람들의 입모양만을 카메라로 보여주고 소리 없이 진행되는데 소리의 세계와 침묵의 세계가 얼마나 다른 세계인지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인상적인 장면이다.


우여곡절 끝에 오디션에 참가하게 되어 영화의 클라이막스인 파리 합창학교 오디션에서 폴라가 부르는 노래가 미셸 사르두(Michel Sardou) ‘Je Vole(비상, 飛翔)’이라는 점은 이 영화의 주제를 뚜렷하게 말해준다. 폴라는 듣지 못하는 부모와 동생을 위해 수화를 동원하여 노래하는데 이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오디션에서 <비상>을 부르는 폴라


Je Vole(비상, 飛翔)


사랑하는 부모님 저는 떠나요

사랑하지만 가야만 해요

오늘부터 두 분의 아이는 없어요

도망치는 게 아니에요 날개를 편 것일 뿐

부디 알아주세요 비상하는 거에요

술기운도 담배 연기도 없이

날아가요, 날아 올라요     


어머니는 어제 근심스런 눈으로 절 바라보셨죠

이미 뭔가를 알고 계신 것처럼

하지만 전 아무 문제 없다고 안심시켜 드렸죠

어머닌 모른척 해주셨죠 아버진 어색하게 웃으셨고     


돌아가지 않아요

조금씩 더 멀어질 거에요

역 하나 또 역 하나를 지나면

마침내 바다를 건너겠죠     


사랑하는 부모님 저는 떠나요

사랑하지만 가야만 해요


오늘부터 두 분의 아이는 없어요

도망치는 게 아니에요 날개를 펴는 것일 뿐

부디 알아주세요 비상하는 거에요

술기운도 담배 연기도 없이

날아가요 날아 올라요     


내가 걸어오는 길에 흘린 눈물을

부모님은 아실까요


전진하고픈 나의 약속과 열망

나 자신에게 약속한 내 인생을 믿을 뿐

멀어지는 기차 안에서 왜, 어디로, 어떻게 갈지

생각에 잠겨요.   

  

내 가슴을 억누르는

이 새장을 참을 수 없어요

숨을 쉴 수가 없죠

노래할 수도 없어요     


사랑하는 부모님 저는 떠나요

사랑하지만 가야만 해요


오늘부터 두 분의 아이는 없어요

도망치는 게 아니에요 날개를 펴는 것일 뿐

알아주세요 비상하는 거에요

술기운도, 담배 연기도 없이

날아가요 날아 올라요

날아가요 날아 올라요     



인간은 돌봄의 영성을 통해 타자의 현실로부터의 도피나 회피가 아닌 공동체 구성원 안에서의 관계 회복을 지향하며 타자를 위한 사랑을 통해 자신의 참된 자아를 발견한다.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에서 길버트가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자신이 처한 현실로부터 도망가지 않으려고 한 것처럼, 이 영화에서 폴라는 자신의 재능을 새롭게 발견하지만 자신에게 의지하는 부모님과 남동생에 대한 책임감으로 인해 자신만의 길을 선뜻 나서지 못한다. 길버트가 끝까지 가족을 지키다가 엄마가 집과 함께 소멸한 후에야 동생의 손을 잡고 떠난 것처럼, 폴라는 자신이 처한 어려운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부모님을 이해시키려 애쓴다. 남자친구 가브리엘이 할머니 차를 끌고 파리로 무작정 가자고 조를 때 폴라는 웃으며 '그렇게 파리에 그냥 가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될 것 같아?'라고 되묻는다. 그리고 부모가 보살핌을 필요로 하기에 오디션은 포기했지만 합창부 공연을 통해 자신이 노래를 통해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  가족에게 보여준다. 이런 과정과 노력울 통해 폴라의 부모는 폴라가 부모의 품을 떠나 자신만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폴라를 놓아준다.

  


[참고자료]

셸리 테일러 (2008), <보살핌>, 사이언스북스.

헨리 나우앤 (2018), <돌봄의 영성>, 두란노.

이혜숙 · 이미혜, “농아인 가족 의사소통특성과 자녀역할에 관한 연구,” 한국가족치료학회, 2005.

Noddings, N.(2002), Educating Moral People: A Caring Alternative to Character Education, Columbia University, 고미숙 역(2018), 배려와 도덕교육, 교육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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