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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ctuary May 09. 2021

영화 <플립>과 보살핌

"옳은 일을 하려면 때로는 희생이 필요하단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글은 앞의 글 <나는 픙경의 전체를 보고 있는가?>의 후속편입니다.    

      

영화 <플립>은 13살 소년 소녀의 풋풋한 만남을 다룬 영화로 세상과 사람을 보는 눈이 성숙해져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성장 드라마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그동안 이 작품을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다지 눈여겨보지 않았던 숨겨진 보석 같은 주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보살핌'입니다.  


줄리의 가족은 아빠 리차드, 엄마 트리나,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두 오빠(마크와 매트 )와 줄리, 이렇게 다섯  명으로 경제적으로 빠듯하게 살아갑니다. 리차드의 직업은 영화에서 명확하게 나오지 않지만 그리 잘나가는(돈을 잘 버는) 직업은 아닐 듯합니다. 줄리의 엄마도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중반부쯤 이르러서야 이들 가족이 처한 현실이 드러납니다. 화창한 일요일 아침, 현관을 열며 아버지 리차드는 딸이 힘들여 가꾼 정원의 모습을 보고 탄성을 지릅니다. 리차드의 손에는 커다란 종이가방이 들려있습니다. 그리고 줄리는 다니엘의 생일을 축하하러 간다는 아버지를 따라 나섭니다.    

  

다니엘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다니엘은 발달장애로 인해 요양 시설에서 살고 있는 리차드의 친동생이자 줄리의 삼촌입니다. 부녀는 낡은 트럭을 타고 다니엘을 방문하는데 덕분에 우리는 미국의 요양 시스템을 살짝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발달장애인 동생 다니엘을 돌보는 리차드


일요일 아침, 삼촌 다니엘의 생일을 축하하러 요양시설에 가는 아빠를 따라 나서는 줄리


다니엘은 태어날 때 탯줄이 목에 감겨 뇌에 산소공급이 부족해져서 장애가 생겼고 몸은 성장했지만 마음은 아직 어린아이 상태입니다. 다니엘은 줄곧 어머니의 돌봄을 받다가 가정 돌봄이 한계에 다다르자 결국 시설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국가에서 운영하는 요양원은 시설이 열악해서 다니엘이 적응하기 힘들어했기에 형 리차드는 비용이 많이 들어도 다니엘을 개인이 운영하는 깨끗하고 친절한 사설 요양 시설에 맡깁니다. 당연하게도 이런 이유로 줄리 가족은 항상 가난하게 지낼 수 밖에 없었겠지요. 


낡은 픽업트럭에 탄 부녀가 도착한 곳은 사설 요양시설
요양시설 주변에 정원을 돌보고 휠체어를 끄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관리가 잘되는 곳이라는 인상을 준다


요양시설 내부. 다니엘의 방을 찾아가는 부녀의 모습. 긴장한 줄리를 안심시키는 리차드




"옳은 일을 하려면 때로는 희생이 필요하단다“     


리차드는 줄리에게 가족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그의 말처럼 돌봄에는 분명 ‘희생’이 따릅니다. 돌보는 사람은 종종 큰 대가를 치릅니다. 리차드는 대학을 중도에 그만둘 수 밖에 없었고 그 집도 소유자가 아니고 세들어 살고 있습니다. 아내 트리나는 아이들에게 좋은 음식을 먹일 수 없고 자주 고장나는 가전제품들을 브라이스네 빌리러 가야 하는 상황에 짜증을 냅니다. 줄리는 선의로 신선한 달걀을 매일 아침 브라이스에게 주었지만 브라이스 가족은 줄리가 지저분한 정원에서 닭들을 키운다고 달걀이 위생적으로 문제가 될거라고 말합니다. 계란을 매번 쓰레기통에 버리는 모습에 줄리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아늑하고 쾌적해보이는 다니엘의 방


돌보는 사람의 삶 속 고통이 커지면 사랑이나 연민이 아닌 의무감과 원망에서 돌봄 행위가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 가족은 힘든 생활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다니엘을 돌봅니다.

돌봄은 결국 사랑이며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달걀 사건과 플라타너스 나무를 지키는 장면이 그토록이나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닭이 낳은 알이 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줄리의 부모


하버드 의대 교수였던 아서 클라인먼은 조기 희귀성 치매에 걸린 아내를 돌보며 미국의 의료제도와 돌봄 시스템의 현실을 비판한 자전적 회고록 <케어(Care)>에서 미국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이 돌봄을 필요로 하는 가족 환자에게 적절한 요양 시설을 찾아주기가 경제적으로 얼마나 벅찬 일인지 지적합니다. 이 책에서 다룬 아서의 아내 조앤의 투병기간이 지금부터 불과 이십 년 전인 2000년대 초반이라는 점, 그리고 그의 직장이 세계 최고 대학 부설 의료시설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이 영화에서 리차드가 동생을 사설 시설에 보낼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줄리는 삼촌 다니엘과의 만남을 통해 아빠를 이해하게 되고 가족의 의미를 곰곰히 생각하게 됩니다.          

   

“집에 오자 모든게 똑같아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대니얼 삼촌은 지금까지 내게 이름뿐인 존재였지만 이제 우리 가족이다.”(줄리의 나레이션)     



삼촌 다니엘의 존재는 엉뚱하게도 브라이스 가족에게도 영향을 줍니다. 브라이스는 사실은 자신도 다니엘처럼 태어날 때 탯줄이 목에 감길 뻔했다는 사실을 할아버지와 엄마를 통해 듣게 되어 충격을 받고, 이 사건을 통해 자기 자신과 줄리 가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브라이스의 엄마 펫시 역시 다니엘의 존재를 알게 된 후, 그동안 남편이 싫어해서 거리를 두었던 줄리 가족 모두를 성대한 저녁식사에 초대합니다.          

   


낡고 허름한 집에 사는 줄리 가족과는 대조적으로 길 하나를 사이에 둔 브라이스의 가정형편은 훨씬 여유로워 보입니다. 아름답게 가꾸어진 정원에 실내도 훨씬 넓고 고급스럽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허름한 마당에서 리차드는 자주 그림을 그리며 자신만의 시간을 가집니다. 이에 비해 브라이스의 아빠 스티븐은 고급 양복을 입고 좋은 집과 멋진 차를 가지고 있지만 표정은 늘 불만으로 가득차있습니다. 특히나 리차드의 상황을 자주 비웃지요. 정원도 잘 가꾸지 못하는 주제에 한가롭게 그림이나 그리고 있다고 한심하다며 냉소합니다.


리차드는 어쩌면 너무 이상적인 아버지로 그려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리차드의 모습이 조금 과장되게 그려졌다해도 "부분보다 전체를" 보는 것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그의 삶의 태도는 돌봄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가족구성원을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려고 하는 모습과 일맥상통합니다. 리차드가 평소에 부분보다 전체를 보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삶이 그렇지 못하다면 줄리는 아빠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기가 힘들었을 테니까요.           


아이들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말은 멋지고 그럴듯하게 하지만 실제 자신의 삶이 그렇지 못한 (저를 포함해서!)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아이들은 부모의 모순된 삶의 태도를 기가 막히게 잘 알아차립니다.


부모가 가식적이고 위선적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부모는 더이상 롤모델이 될 수 없고 아이도 마음의 문을 닫게 됩니다. 저도 아주 어릴 때 아버지가 항상 거짓말 하면 안된다고 정직하라고 이야기하셨지만 정작 자기 친구에게 거짓말하는 것을 보고(지금 생각해보면 사소한 거짓말이긴 했지만)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더 나아가 삶으로 보여줄 때 그것이 진짜 살아있는 교육이 되겠지요. 그러나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다가 어떤 문제로 인해 고통을 당할 때 가족이나 친구가 그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해줄 수 없어도 그 일을 함께 아파하고 내 곁에 끝까지 있어줄 때 큰 위로를 받은 경험이 적어도 한번쯤 있을 것입니다. 


영화 <플립>은 알콩달콩 십대의 사랑을 보여주면서도 잠깐이지만 다니엘의 존재를 통해 녹록지 못한 상황에서도 돌봄이 필요한 가족 구성원을 끝까지 책임지며 사랑하고자 하는 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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