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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ctuary Jun 08. 2022

약하지만 부지런히 나아갑니다

바흐의 위로와 격려

 J.S.Bach - 칸타타 78번

<예수, 당신은 나의 영혼>

(Jesu, der du meine Seele) 중

‘약하지만 부지런히 나아갑니다’
 (Wir eilen mit schwachen doch

   emsigen Schritten)


매일 아침 6시부터 클래식 FM을 밤 11시까지 틀어놓고 지낸다. 광고나 쓸데없는 멘트가 없어 좋다. 습관이 되서 이제는 클래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딸아이도 음악이 없으면 허전하다며 어쩌다 잠깐 끄기라도 하면 냉큼 가서 FM을 연결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아침 6시 ‘새아침의 클래식’. 진행자 멘트가 거의 없고  바로크 음악 위주로 선곡이 되어 차분하게 아침을 맞을 수 있다. 바흐의 음악은 언제나 영혼을 건드리지만, 며칠 전 처음 들어본 곡은 특히나 귀에 쏙쏙 마음에 착 달라붙어서 스펀지의 물처럼 나에게 흡수되는 듯했다. 진행자의 소개가 먼저였는지 곡이 먼저 나온 후에 제목을 소개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곡의 제목과 연주가 너무나 조화로웠다.

곡 제목은 “약하지만 부지런히 나아갑니다"


내가 들은 연주는 특이하게도 Brass와 organ을 위한 편곡버전이었는데 보통 이 곡은 소프라노와 알토의 이중창으로 불리어지는 곡인 듯하다. 그런데 곡을 찾아보니 물론 이중창도 아름다웠지만 브라스와 오르간, 이 두 악기가 얼핏 맞지 않을 것 같은데 막상 같이 합주된 곡은 앞으로 한걸음 한걸음 조금씩 조금씩, 약하지만 부지런히 나아간다는 제목처럼 앞으로 나아가려는 단단한 의지가 너무 무겁지 않게 그러나 힘있게 느껴졌다.    


https://youtu.be/_qvl1yktWzU

J.S. Bach: Wir eilen mit schwachen, doch emsiger Schritten from Cantata No. 78, Jesu

J.S. Bach: Wir eilen mit schwachen, doch emsiger Schritten from Cantata No. 78, Jesu, der du meine Seele (2005 Digital Remaster) · Empire Brass



'힘차게 부지런히' 보다 '약하지만 부지런히'는 얼마나 겸손한 표현인가.


나의 연약함, 나약함을 받아들이면서도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겠다는 조용한 의지가 느껴지는 표현이다.

나도 이렇게 '약하지만 부지런히' 무엇보다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다음은 Teresa Stich-Randall and D. Hermann이 부르는 Duet 버전이다. 앞의 브라스 오르간 버전과는 느낌이 확연히 다르지만 역시나 영혼을 건드리는 아름다움이 있다. 나는 클래식을 잘 모르지만 이 곡에선 조금 더 부드러운 의지와 유연함이 느껴진다.


https://youtu.be/ujLK28Nlmq4

Choir and Orchestra of the Bach Guild conducted by Felix Prohaska, Vienna, 1954




지난달 그러니까 5월, 내 생일을 기점으로 하여 몇 가지 작은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먼저 요가를 제대로(!) 다시 시작했다.

드디어 마음에 드는 요가원을 발견했다. 그 동네 사는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오래된 전통을 지닌 요가원을 일주일에   다니고 있다. 집에서 가깝지는 않지만 오고 가는 길이 흥미롭다. 돌아오는 길에 시간이 되면 국립현대미술관을 둘러보기도 하고 슬슬 북촌 골목을  산책하거나 기운이 남으면 교보문고까지 내처 걸어서 돌아올 때도 있다.

소박한 수련 공간에서 오래된 시간이 주는 편안함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점은 절대로 무리하게 진행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느슨하지도 않다는 . 그래서 따라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그동안 딸아이와 남편을 비롯한 가까운 이들을 대할  느닷없이 솟구치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몸의 피로함, 통증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근처에 난립한 수많은 필라테스나 요가 강습소들을  군데 다녀보았지만 나와는 맞지 않아 끝까지 다니지 못했다. 이번에는 꾸준히, 약하지만 부지런히 나아갈  있으면 좋겠다.


두번째, 절대 끊을 수 없다고 믿었던 커피를 끊었다. 에스프레소 샷 2개를 꽉 채워 아침에 한 잔, 오후에 한 잔, 유난히 진한 커피를 즐겨 마시던 내가 이제 한 모금의 커피도 입에 대지 않는다. 카페인을 피하라는 의사의 강력한 권유를 계속 무시하다가.. 몸상태가 안좋아지면서 이번엔 결심할 수 밖에 없었다. 적어도 3개월만 끊자. 그리고 치유가 되면, 좋아지면 다시 마시면 되지. 커피 못마시면 무슨 재미로 사나 싶었지만 막상 커피 없이도 재미있게 잘 살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다만 커피를 못마시는 허전함을 다양한 차(Tea)를 브랜딩하여 마시면서 달래고 있다. 동생이 커피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생일 선물로 너무 오래 써서 낡은 모카포트를 대체할 비알레띠 뉴브리카를 택배로 보내주었지만…뜯지 않고 그대로 모셔두고 있다.  


구기자, 감초, 페퍼민트, 곽향, 감잎 등의 차들을 브랜딩한 티백들


세번째는, 이걸 변화의 카테고리에 넣을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복잡하게 느껴지는 인간관계들을 조금씩 정리해보는 시도를 하고 있다. 관계에도 디톡스가 필요하다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아마 그러한 것일게다. 소소하게는 핸드폰 전화번호나 카톡, 페북 등의 SNS들도 조금씩 정리를 시작했다. 나에게는관계에 대한 과한 욕심이 있다. 그 집착과 지나친 기대가 나자신과 관계자체를 힘들게 만들 때가 많다. 그냥 물흐르듯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만남을 가지면 좋으련만.


마지막으로 사춘기 딸아이와 적절한 거리두기를 하려고 노력 중이다. 잔소리를 최대한 줄이고 독립하려는 의지를 지지해주며 과잉보호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물론...당연히 잘 되지는 않는다. 커피 끊는 일이 이것보다 훨씬 쉽다.  그렇지만 시작했다는 게 나에겐 중요하다. 그래서 약하지만 부지런히 나아가려고 한다. 더 늦기 전에. 한걸음 한걸음, 멈추지 않고.



P.S. 글을 쓰다가 문득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걸어도 걸어도>이 떠올랐다. 영화의 거의 끝무렵에
걸어가던 가족의 뒷모습이 생각나서 찾아보니 내가 기억하고 있던 영화의 바로 그 장면이 일본판 포스터에
사용되었다!


걸어도 걸어도(Still Walking, 고레다 히로카즈,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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