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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 권도 Aug 31. 2015

도로명주소와 내비게이팅 시스템, 그리고 UX

주변에 도로명주소체계에 대해 불평을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 마다 나는 도로명주소가 필요한 당위성을 설명하고 싶지만, 말이 너무 길어질까봐 그냥 "도로명주소가 기본적으로 우리 생활에 더 편리한 것은 맞아. 우리가 기존 체계에 너무 익숙해져 있고, (조심스럽지만) 현재의 도로명주소 체계가 잘 만들어지지 못해서 불편하게 느끼는걸꺼야." 라고만 하고 그냥 넘어가곤 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몇 가지 측면에서 도로명주소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오랫동안 써보고 싶었던 글이기도 하다.


1. 도로명주소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을 특정하거나 호명(칭)하기 위한 것이지만, 건물은 특정하거나(간혹 하기도 한다. 다른 건물들과는 확연히 차별화된 경우) 호명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름을 붙이진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 건물에 이름이나 주소를 붙이는 이유는, 사람이 찾아가기 쉽게 하기 위함이다. 애초에 주소는 이런 이유로 만들어진 체계이다. 즉,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체계인 것이다. 아래의 상황을 한번 보자.


스마일씨는 과연 끝까지 웃으며 목적지까지 갈 수 있을까?


사람 A: 나 지금 가로수길에 들어와서 압구정쪽으로 가는 중이야.
사람 B: 골목 따라 조금만 더 걸어오다가 그 뭐지, 무슨 성형외과 있는 골목으로 들어오면 돼.

사람 A: 나 지금 가로수길에 들어와서 압구정쪽으로 가는 중이야.
사람 B: 아 그래 그럼 쭉 따라 오다가 압구정로 8길로 들어와서 조금만 오면 보일거야.


물론, 목적지까지 가는 길에 성형외과가 하나만 있다면, 어쩌면 쉬운 설명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 사이에 성형외과가 한 개라도 더 있다면 사람 B는 더 이상 스마일로 표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자와 같은 경우는 너무나도 명확하다. 왜냐면 압구정로 8길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절대 전자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진 않을 것이다. (근데 지도에 보면 압구정로 12길은 두 개이다. 네이버 지도의 오류라고 굳게 믿고 싶다.)


2. 내비게이팅 시스템

차량 내비게이션에 의지해서 운전을 해본적이 있다면 위와 같은 상황에서의 어려움을 더 잘 느낄 것이다.  특히 아예 처음 가는 길일 경우에는 주로 내비게이션을 이용하여 길을 찾아가게 되고 이런 경우, 내비게이션의 화면과 음성이 알려주는대로 운전을 하게 된다. 내비게이션은 이런 경우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근데, 지금의 차량 내비게이션을 이용하는 행태는 운전하며 스마트폰을 보는 것 만큼이나 위험하게 설계되어 있다. 특히 운전에 익숙하지 않을수록, 길이 복잡해질수록 말이다.


카 내비게이션에 의지해서 목적지를 과연 잘 찾아갈 수 있을까?

위와 같은 경우 내비게이션의 음성안내는 아래와 같다. (음성안내를 이용한다면..)


다음 사거리에서 좌회전 한 후 바로 우회전입니다.

내비게이션을 많이 사용해 본 사람이라면 단번에 눈치를 챘을 것이다. 위의 안내는, 대부분의 국내(한국) 내비게이션의 음성안내이다. 이 경우 내가 정확한 길을 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음성을 들으며, 눈 앞의 교통상황을 살피며, 지속적으로 내비게이션 화면의 방향 안내를 계속 봐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우회전을 하라고 했기 때문에 봉은사로 2길로 들어설 확률은 상당히 높다. 또는, 올바른 길로 들어섰는지 확인하기 위해 내비게이션 화면을 주시하다가 위험한 순간을 맞이할 확률도 낮지는 않을 것이다.


사평대로 방향으로 좌회전 한 후 봉은사로 4길로 우회전입니다.

반면, 위의 안내는 일반적인 외국의 내비게이션에서 나오는 음성안내를 한국의 도로명주소를 사용한다고 생각하고 적용한 경우이다. 이 경우 두 가지 큰 장점이 있다. 첫째는, 내가 가야할 도로의 이름을 알기 때문에 무턱대고 첫번째 우회전 도로(봉은사로 2길)로 들어서지 않을 것이다. 두번째, 내가 들어서야 할 도로의 이름을 알기 때문에 내비게이션 화면을 볼 필요 없이 도로명주소 표지판을 보기 위해 계속 전방을 주시할 수 있다. 전방을 계속 주시한다는 것은 운전 중에 꼭 지켜야 할 수칙 중에 하나이고, 운전 중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이다.


강변북로를 이용해서 마포대교를 타려는 스마일씨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첫번째 상황에 공감이 가지 않는다면, 이 상황은 어떨까? 분명히 얘기하지만, 운전에 익숙하지 않거나 내비게이션에 의지해서 운전을 하는 경우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마포대교 방향으로 우측방향입니다.

물론 안내 표지판은 항상 있을 것이고, 볼 수는 있지만 우측방향으로 나가는 길은 두 개이다. 내가 가야하는 길이 이 우측 방향인지, 저 우측 방향인지 내가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늠하기가 어렵다.


A-35번 출구로 우측방향으로 나갑니다.

A-35번은 임의로 붙인 간선출구 게이트 번호이다. 간혹 운전을 하다보면 우리나라도 이 게이트 번호를 사용하고자 했던 흔적은 보이지만, 실제 부여되지 않은 게이트도 많고 내비게이션에는 사용하고 있지 않다. 내가 가야하는 길이 우측에 있는 몇 개의 도로 중에 하나가 아닌, A-35번 도로라면, 좀 더 정확하게 나갈 수 있지 않을까? 간선도로, 고속도로 등에서 지선도로로 나가는 게이트에 붙여지는 이름도 명백히 하나의 도로명주소이다.


3. 사람을 위한 UX

도로명주소는 사람을 위한 체계인 것은 분명하다. 사람들이 모든 지명이나 건물명을 외우고 다닐 수 없기 때문에 쉽게 참고할 수 있고, 찾을 수 있고, 그리고 설명할 수 있는 주소체계가 필요한 것인데, 도로명주소는 기존의 지번주소보다 훨씬 그 역할을 잘해 낼 것이고, 결국 사람들을 편하게 해줄 수 있는 도구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이상적인 이야기지만, 건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도로가 닿아야 한다는 것 또한 사람을 위한 체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기존 체계에서는 도로가 하나도 없는 외딴 곳에 있는 건물에도 쉽게 주소를 부여할 수 있었던 반면, 도로명주소는 도로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작든 크든 도로가 있어야 한다. 결국, 이것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도로로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생활 반경을 넓혀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구획에 의한 차별을 없애주는 역할도 하게 될 것이다. (인식에 의한 차별은 오롯이 사람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결론.

물론 처음부터 도로명주소 체계를 접하는 세대는 혼란스럽지 않을 수 있지만, 기존 체계만을 사용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혼란스럽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앞으로 수십년은 더 살아야하기 때문에 문제없이 새로운 체계에 익숙해질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쉽게 익힐 수 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많이 듣고, 많이 쓰면서 편리한 체계라는 것을 직접 경험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우선, 본질에 대해 생각해 봐야한다. 그러면 그 가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도로명주소의 본질은 무엇일까?

- 왜 도로명주소로 바뀌어야 하는건가?


그 다음은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면 가치를 제대로 살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 그렇다면 도로명주소를 잘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 어떻게 도로명주소를 사람들의 습관으로 바꿀 수 있을까?


출근하면서 찍은 사진이다. 왼쪽의 사진에서는 사거리 어디에서도 각 도로의 이름을 알 수 있는 표지판을 찾아볼 수가 없다. 오른쪽의 사진은 이 건물의 주소는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우리나라의 도로명주소 체계 도입은 사람들에게 도로명주소의 가치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에도 실패했고, 흔히 기반시설이라고 부르는 맥락을 고려한 디자인 또한 실패했다. 어쩌면 우리는 이대로 지번주소와 도로명주소 두 개를 계속 같이 써야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불완전한 상태에서 정부의 강제에 의해 도로명주소를 단독으로 사용하게 되는 상황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비교적 덜 고민해볼 수 있는 방법으로 우선 차량 내비게이션과 버스 정류장부터 도로명을 이용한 시스템으로 바꿔 나가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버스정류장은 버스의 진행방향 상의 바로 다음에 만날 수직의 도로명을 정류장으로 이용하고, 차량 내비게이션의 모든 안내(음성포함)를 도로명으로 바꾸는 것이다. 특히 이것은 단순히 도로명주소를 위한 디자인이 아니라, 점차 HUD(Head Up Display)나 웨어러블 기기가 보편화되면서 더더욱 음성을 이용한 안내가 중요해질 것이다. 즉, 단순히 우측방향입니다. 좌측방향입니다가 아닌, 정확한 도로명을 안내해주어야 하는 것이 중요해진다는 말이다. 지도의 그래픽적인 퀄리티보다는.


모든 시스템은 당연히 사람을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물론 다른 목적들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위한 것들이다. 그냥 선진국에서 이미 도입했고, 표기가 편해진다는 식의 기술적인 이유말고, 진짜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그 이유를 찾고 공감해본다면 더 큰 당위성을 찾아낼 것이고, 왜 잘 만들어야 하는지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만들어 놓은 도로명 주소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이유야 어쨋든 많은 사람들이 불편하게 느끼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테니 말이다. 처음부터 잘 만들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지금부터라도 꾸준히 개선하고 도로명주소를 잘 사용하기 위한 여러 시스템을 마련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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