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설은 세웠는데, 지표가 안 떠오를 때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고 가치를 제공하라.”
제품과 서비스 기획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문장입니다. 저 역시 기획자로서, 그리고 강의나 멘토링을 진행할 때마다 이 문장을 수없이 반복해 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이 문장만으로 공급자 중심의 시선을 거둘 수 있을까? 정말 ‘고객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말만으로, 우리가 고객 중심의 기획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부트캠프나 특강에서 예비 기획자/PM/PO들과 멘토링 시간을 가지곤 합니다. 실전 프로젝트 단계가 되면 PM/PO로서 문제를 정의하고,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검증할 수 있는 지표를 함께 고민하고 피드백합니다. 그런데 멘티들이 떠올린 지표들은 대부분 MAU, 매출, 유입률 같은 익숙한 숫자들이었습니다.
왜 그런 지표를 택했냐고 물어보니, “서비스가 잘 되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요”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이 말에는 사실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서비스가 잘 되고 있는지 알고 싶다는 마음은 너무도 당연하니까요. 그런데 한 가지가 빠져 있었습니다. 바로 '누구에게 잘 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이 빠진 상태에서 지표를 택하면, 결국 ‘내가 보고 싶은 모습’을 기준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이는 사실 취업준비생 및 주니어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초기 스타트업 임직원분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진행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MVP 단계에서 검증할 지표를 고르는 시간에도, 어김없이 MAU와 매출액이 1순위로 나왔습니다.
여기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정말 우리는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는 제품’을 만들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내가 기대하는 결과를 내는 제품’을 만들고 싶은 걸까요?
제품은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고 가치를 제공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제품의 본질 혹은 목적은 고객의 문제 해결, 다시 말해 고객의 성공에 있습니다. 나의 성공, 사업의 성공은 이에 따른 결과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조금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던져보면 어떨까요?
“이 제품을 통해 고객은 어떤 모습이 되길 바라시나요?”
“고객이 이 기능을 쓰면, 어떤 점이 더 좋아지게 되나요?”
“이 서비스를 통해 고객의 하루, 고객의 선택, 고객의 행동은 어떻게 바뀌게 될까요?”
혹은 이런 식으로도 질문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이번 제품 혹은 기능을 통해, 고객에게서 유도하고 싶은 변화는 무엇인가요?”
“고객이 어떤 행동을 해주기를 기대하시나요?”
이 질문은 모두 고객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제품을 통해 고객이 문제를 해결한 모습, 그리고 이를 통해 나타나는 행동 혹은 현상의 변화.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가설 검증을 위한 핵심 지표도 떠오릅니다. 결국 지표는 어떤 행동이나 현상의 변화를 포착해 기록한 것뿐이니까요.
무엇보다 이런 질문을 통해 구상해 낸 지표는 MAU나 매출처럼 결과로 나타나는 후행지표가 아닌, 고객의 행동 변화나 문제 해결 여부를 보여주는 과정 중심의 선행지표입니다. 왜냐하면, 고객의 성공은 언제나 결과보다 먼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더욱 빨리 검증할 수 있고, 더욱 쉽게 통제 및 실험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고요.
고백하자면 저 역시 처음부터 이런 관점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담당자로서 맨 처음 기획했던 제품은 크게 실패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당시엔 실패 원인을 코로나 등으로 타이밍이 안 좋았기 때문이라거나, 적은 예산으로 인해 홍보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다시 돌아보니 문제는 훨씬 더 근본적인 곳에 있었습니다. 고객이 누구인지, 그들이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한 고객은 어떤 모습인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던 겁니다. 제품을 만든 목적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적은 고객의 변화가 아니라 내가 기대하는 지표의 상승이었습니다.
이후에도 유사한 경험을 여러 번 반복하며 배웠습니다. ‘고객 중심’이라는 말을 되뇌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 고객이 변화한 모습을 상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다시 ‘나의 관점’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요.
다시, 제품은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고 가치를 제공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제품이 해야 할 일은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고, 우리의 가장 중요하게 검증해야 할 가설은 제품이 과연 우리의 기대처럼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들의 성공을 돕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검증할 지표 역시 고객이 문제를 해결하고 성공에 도달하여 그 과정에서 변화하는 행동 혹은 현상일 테고요.
제품이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는 순간, 고객은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요?
그들은 무엇을 더 잘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무엇에 시간을 덜 쓰게 되었을까요?
어떤 결정을 더 쉽게 내리게 되었을까요?
이렇게 고객의 변화된 모습을 그려보는 것. 그것이 바로 가설을 세우는 첫걸음이며, 그 변화가 실제로 일어나는지를 검증하는 것이 바로 ‘좋은 지표’의 시작입니다. 기획자는 늘 숫자와 마주하지만, 숫자에 앞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달라진 모습을 제대로 그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숫자 속에서 진짜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